SBS월화드라마"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에 나오는 왕자들이 많이 나오죠

그중에 중심이 되는 인물들의 실제 가계도를 보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데

재미를 두배로 주겠죠.

 

드라마에서 나오는 태자 무는 고려 2대왕 혜종이 됩니다.

재위기간은 943년~945년 입니다.

자녀는 2남3녀를 두었는데 그중 경화궁부인은 광종의 비가 됩니다.

 

드라마에서는 홍종현이 맡고 있는 3황자 왕요는 결국 왕위에 오르는데 바로 고려 3대 정종입니다. 재위기간은 945년~949년 입니다.

실제 역사속에서는 이준기가 맡고있는 왕소와 힘을 합쳐 혜종을 압박합니다.

부인인 문공왕후 박씨,문성왕후 박씨는 드라마에서 최병모가 맡고있는 박영규(후백제 견훤의 사위)의 딸입니다. 

드라마에서 이준기가 맡고 있는 4황자 왕소는 고려 4대 광종입니다.

실제 역사속에서는 부인이 2명입니다.

왕후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드라마에서 강한나 맡고있는 황보연화입니다. 

경화궁부인 임씨는 2대 왕 혜종의 딸입니다.

드라마와 달리 실제에서는 금슬이 좋으셨나봐요.

자식을 다섯이나 두셨네요.

드라마에서 8황자 왕욱의 가계도 같이 올려봤습니다.

추존왕은 실제 왕이 되지는 못했으나 후손 중에 왕이 되었을 경우 사후 왕으로 격상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부인은 1명이고 그중 차남이 고려 6대왕 성종이 됩니다.

딸인 헌애왕태후 황보씨,헌정왕후 황보씨는 고려 5대 왕 경종의 부인입니다.

그리고 헌애왕태후 황보씨는 우리가 아는 고려 7대왕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입니다.

그러면 왕소와 왕욱은 이복형제도 되고 왕욱의 여동생이 왕소의 부인되고 딸은 왕소의 아들(경종)과 결혼했으니 사돈관계가 되기도 하고 복잡합니다. 

 

고려왕실의 가계도 상당히 관계가 복잡합니다.

혈족간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드라마보시면서 실제 역사와 비교해 보면

소소한 재미를 더 해 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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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인 19세기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탐관오리의 부정이 심하였고 농민과 일반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지면서

농민은 종전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항거,봉기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지배층에 대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 1811년(순조 11)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알아보겠습니다.

특히 홍경래의 난이 관심있는게 지금 방영하고 있는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김유정이 하고 있는 홍라온이 홍경래의 딸이 아닌가 하게하는 장면이 많이 나와서 그런거 같습니다.

홍경래는 평안북도 용강군 다미면에서 1771년(영조 47)에서 태어나 1812년(순조 12)까지 사신 실존인물입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외숙 유학권에게 학문을 배웠고 평양향시를 통과하고 유교와 풍수지리를 익힌 지식인이었습니다.

입신양명을 위해 1798년(정조 22)사마시에 대과를 보았으나 

낙방하였습니다.

그외 가족관계나 어디서 살았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한양에서 시행되었던 대과에서 시골선비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에 출진하기가 어려웠고 더욱이 평안도 서북출신인 홍경래에게는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초 서북출신(평안도)들은 고려의 유민으로 구분되어 등용되지 못했고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지역감정이지요.

대부분의 고위관리들은 영남,호남,호서출신들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재까지 되고있는 지역감정은 그 유래를 찾자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봐야죠.

옆길로 새고 있네요.

대과에 낙방하였으나 과거를 치룰만큼 경서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지녔고 병서(兵書)나 제반 술서(術書),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하였다.

다시말해 홍경래는 이런 현실에 낙담하여 부패한 세상을 바꿀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하였다.

정치적으로 치열했던 당쟁의 시대가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김씨 일족의 세도정치가 성립되어 삼정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촉진시켰고 특권 상인과 지방 상인간의 대립도 심하게 되었다.

 

조선은 전국의 지방을 8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8도 가운데 조선 지배층의 대부분은 삼남지역이라고 하는 영남,호남,호서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조선의 북부지방인 함경도와 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단, 함경도는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지역으로 왕가의 탄생지로 인식되어 그나마 중앙정부의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평안도는 그렇치 못하였다.

물론 조선 정부에서 지방민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평안도 지역 일부인사를 특채로 채용하기도 했으나 다른 지방에 비해 미미했다.

평안도의 지역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홍경래의 난이 봉기할 때 쓴 격문의 내용을 보시면 쉽게 이해가 갈수 있다고 봅니다.

 

"조정에서는 서토(西土-평안도)를 버림이 더러운 땅과 다름이 없다.심지어 권세가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평민놈이라 일컫는다.서토에 있는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는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지하고 또한 과거를 볼때는 반드시 서토의 문장을 빌었으니 400년 이래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그래서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서 평안도는 300년이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 사대부는 이들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랜 기간 소외되었던 평안도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며 변화의 기운을 맞이하였다.

변화는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유상(柳商-평양상인),만상(灣商-의주상인)을 중심으로 대청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18세기 후반에는 광산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잠채(潛採)라하여 불법적인 형태로 채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수탈은 점차 가중되며 사회적인 모순은 확대되어 갔다.

 홍경래는 풍수로써 전국 각지를 돌며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삼정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해 직접 체험하며 인식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풍수로 부호의 집을 드나들던 우군칙을 만나 뜻이 통하자 반란을 모의하게 되었다.

그는 현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향촌에서 부를 축적하여 하층지배자로 진출한 계층과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에 접근 하였다.

그리고 관로가 막혀 현실에 부만을 품고 있던 양반지식층에 접근해 진사 김창시 등을 반란군에 동참시켰고 우군칙과 가깝게 지내던 이희저를 이용해 대상(大商)들의 후원금을 받도록 하였다.

즉 정주성의 거부 이침,김석하, 안주상인 나대곤, 송상 박광유.홍용서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 었다.

역사(力士)의 발굴에도 힘써 제상 홍총각,평민 이제초 등의 장수 그리고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 등을 동참시켰다.

 

그리하여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10여년간 준비하여 1811년(순조 11) 대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홍경래의 난 봉기이념은 《정감록》에 나오는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과 토호관속을 향해서는 지역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 초기에는 각지의 내통세력의 도움으로 민폐를 끼치지않고 군율에 따라 쉽게 가산,곽산,박천,태천 등 등 7개읍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난 주도세력안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홍경래마저 부상을 당하는 등 사태가 불리해지고 주도세력안에 홍경래를 암살하여 정부군에 공을 세우려는 배반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가운데 박천,송림전투에서 토벌군에게 패배하여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정주성에서 4개월간 버티었으나 땅굴을 파들어가 성을 파괴한 토벌군에게 결국 성은 함락되고 홍경래 또한 총을 맞고 죽고 만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어린 소년을 제외한 1,917면 전원이 일시에 처형되었고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농민 봉기와 달리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기 충분합니다.

 

난의 실패원인을 요약하자면 토지문제,신분제철폐 등 사회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단지 곡식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은 당시 사회발전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한 지식인과 장사들이 주체적으로 봉기했다는 점에서 후기 지배체제를 허물어가는데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그후에도 사회변혁세력들은 민초들의 희원을 담아 홍경래가 죽지않고 섬에서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후대의 평가는 6.25 이전에는 당쟁사적 관점에서 단순히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 혹은 이를 이용한 횽경래 개인의 정권탈취기도로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이후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성장한 향촌의 부호,경영형 부농,서민지주,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지식인 등이 광산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농민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홍경래의 난을 애기할지 궁금하네요.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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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KBS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달빛"이 인기가 많은 거 같아요.

김유정이 맡고 있는 홍삼삼이가 내시인데요

내시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데 도움이 될것 같네요.

 

내시는 우리가 흔히 아는 거세된 남성으로만 알고 있는데

조선시대로 국한한다면 맞는 말이나 남성기능을 상실한 환관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내시는 조선시대의 내시와 성격이나 신분이 많이 달랐습니다.

고려때는 내시와 환관이 별도로 있었고 고려 내시는 환관이 아니고 성불능자도 아니었다.

고려 초기에는 내시는 가문과 학식을 갖춘 엘리트 집단으로써 문벌집안의 아들,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내시로 등용되었다.

내시의 역할은 왕의 옆에서 국정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왕 행차시 동행,왕명 초안작성,국가기밀 관리,유교경전 강의,왕실재정 담당,민정을 살피는 역할 등 왕의 최측근으로 일했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조선시대의 승정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려 내시는 고려 건국부터 있었으나 무신정변이후에는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의 내시처럼 거세한 남성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환관으로 불리었고 액정국에 소속돼 궁중의 잡역을 담당하였고 내시가 엘리트집안 자제였다면 환관은 대부분 노비,관비소생,천민집단 부곡 출신이었다.

내시와 환관이 고려시대만 해도 전혀 다른데 내시하면 당연히 거세된 남성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고려말 원나라의 영향때문이었다.

원나라에서는 환관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이와같은 현상은 원나라의 부마국가였던 고려 무신집권기에도 그대로 전해져 왕의 신임을 받는 환관이 내시로 임명되었다.

그러다보니 내시제도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트집단이었던 내시가 숫자가 늘어나면서 쉽게말해 질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공민왕때 환관의 관청이 신설되었는데 관청의 이름이 내시부(內侍府)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내시부 소속 환관과 원래의 내시가 혼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최고 엘리트로 지칭되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조선 세종 때 내시가 환관 내시와 용어상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이유로 고려 내시를 내직(內直)으로 개칭하고 세종12년에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환관과 구별되는 고려 내시제도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고종 1894년 갑오개혁후 환관제도 또한 완전히 폐지됩니다.

 

조선시대에는 내시의 득세를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고려에 비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종2품의 품계까지 허용되었지만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내시는 품계의 고하를 막론하고 궐내의 음식물 감독,왕명전달,궐문 수직,청소 등의 잡무에 국한되었습니다.

지위가 하락하고 영향력이 축소된 반면 의무규정은 강화되었다.

자질향상을 위해 사서(四書)와 소학,삼강행실 등을 교과목으로 교육울 받아야 했고 매월 시험을 쳐야 했다.

시험을 통해 통(通),약통(略通),조통(組通),불통(不通) 등의 성적평가를 받았고 근무일수와 함께 고과(考課)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고과법에 따라 1년에 4번 근무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교육을 철저히 한 것은 자질향상과 통제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궐내에 상주해야 하기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자격이 있었다. 원래 선천적인 거세자가 주된 충원자였으나 스스로 거세해 내시로 임명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환관은 내시부에 속했으며 대전,왕비전,세자궁,빈궁전 등에서 감선,사명(명령전달)및 궐문수직,청소등의 잡무를 맡아 보았다.

내시부는 종2품의 상선 이하 상온,상다,상약,상전,상책,상호,상탕,상세,상촉,상훤,상설,상제,상문,상경 및 종9품의 상원에 이르기까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속으로 서원2명과 사령1명이 있었다.

또한 환관집안의 대를 끊기는 것을 배려해 양자를 들일수 있도록 하였고

처첩을 거느리기도 했는데 환관의 아내를 환처 또는 동정녀라고 하였다.

환관은 궁안에 거주하는 장번환관과 궁궐에서 가까운 종로구 봉익동과 효자동에 집단 거주하면서 출퇴근하는 출입번 환관이 있었다.

또한 왕을 가까이 모시는 장번환관은 대전 장번내시로 대감호칭을 받을 정도로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환관은 모시던 왕이 승하하게 되면 궁궐 밖에 나와 살았고 죽을 때까지 소복하였다고 합니다.

 

대략 내시에 알아보았습니다.

드라마보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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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니나가 잡혀있는 마왕의 소굴로

어른들은 모르는 사차원 세계

날쎄고 용감한 폴이 여기있다.

요술차 마술봉 딱뿔이

삐삐 찌찌 힘을 모으자

대마왕 손이귀에 있는 나나를 구해내자

삐리빠빠 삐리빠빠 달려간다. 삐삐

 

지금도 한번씩 흥얼거리는 만화영화주제가인데요

바로 "이상한 나라의 삐삐"의 주제가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삐삐는 1976년 독수리오형제와 개구리 왕눈이를 만든 일본 다츠노코프로덕션에서 총50편으로 제작한 시리즈 만화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TBC(JTBC의 전신)에서 "이상한 나라의 삐삐"로 방영하였고 이때 제가 봤는데 나이 많이 먹었네

그후 1984년 5월부터 1985년 5월까지 KBS에서 "이상한 나라의 폴"제목으로 재더빙하여 방영하였고 1996년에는 SBS에서 "이상한 나라의 폴"이름으로 재더빙하여 방영하였습니다.

특히 하게도 TBC,KBS,SBS 방송국 3사에서 같은 만화영화를 재더빙하여 총 세편의 더빙판이 존재합니다.

그 뒤에 EBS에서 2009년에 KBS더빙판을 방영하였습니다.

 

마법의 세계를 지배하는 대마왕을 현실세계에서 온 폴이 대마왕을 무찌른다는 내용으로 폴은 가난한 재단사집 소년으로 공상을 좋아하는데 부모님으로부터 10살 생일을 맞아 봉제인형을 선물을 받는데 그 인형속에 봉인되어있던 요정 파쿤(찌찌)은 폴과 폴의 여자친구 니나, 그리고 나나의 애완견 톳페(삐삐)를 이상한 나라로 인도한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톳페는 말도하고 사람같이 두 다리로 서고 하늘을 날수도 있으며 사람이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장남감 차가 슈퍼카로 변신하는 신기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대마왕이 깨어나 나나를 납치한다.

결국 폴의 일행은 니나를 이상한 나라에 남겨둔 채 원래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나나를 구해내기 위해 폴의 일행은 이상한 나라를 오가며 대마왕과 그의 부하들과 피할수 없는 싸움을 하고 나중에는 니나를 구하고 이상한 나라를 위해 대마왕 일당을 물리칩니다.

 

폴이 가지고 있는 '딱부리' 라는 요요은 실제 어린이들 사이에도 인기를 얻고 요요붐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찌찌가 가지고 있던 마술봉 같은 것으로 치면 폴이 가지고 있던 장난감차는 이상한 나라에서 요술차로 변신하여 직접 운전하고 하늘을 날아다기도 합니다.

마술봉로 바닥을 치면 이상한 나라로 가는 입구가 생기고 물건을 치면 커지게 됩니다.

 

찌찌가 목걸이를 통해 시간이 다 되었음으 알려주면서 마술봉으로 바닥을 쳐서 현실세계와 이상한 나라로 가는 통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릴적 진짜 좋아하던 만화영화인데···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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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생활지혜 2016. 9. 5. 09:22

 

1. 꿀 뜰때 깔끔하게 덜어내는 방법

숟가락으로 미리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꿀을 덜어내면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덜어낼 수 있습니다.

 

 

2. 샤워기 구멍이 막혀 물이 잘 안나올때

사워기를 오래 사용하다보면 구멍이 막혀 물이 잘 안나오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럴때는 물과 식초를 6:1 정도로 섞어 샤워기를 담가두세요

하룻 밤 정도 지난후에 물을 틀면 구멍이 뚫려 물이 잘 나옵니다.

 

 

3. 귤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려면

겨울에 귤을 박스로 사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박스 밑부분에 있던 귤이 상해서 못먹는 경우가 발생하는데요.

그것을 방지하려면 귀찮더라도 박스 밑에 신문지를 깔아주세요.

그리고 귤을 신문지위에 늘어 놓은 뒤에 다시 그 위에 신문지를 깔고 또 귤을 올리세요 이런식으로 귤을 보관하면 오랫동안 잘 보관하면서 먹을 수 잇답니다.

 

 

4. 상한 우유인지 의심이 될때는

우유가 상한 것인지 신선한 것인지 눈으로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냉수에 우유 몇방울을 떨어뜨려 보세요

떨어진 우유가 물에 퍼져 물이 금방 흐려지면 상한 우유입니다.

물에 바로 퍼지지 않고 아래로 가라앉는다면 신선한 우유라고 할수 있습니다.

 

5. 단추가 떨어지려고 덜렁거릴 때

단추가 실밥이 풀려 떨어지려고 덜렁거리는데 당장 바느질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매니큐어를 단추실밥에 조금 발라주세요.

그러면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답니다.

 

 

6. 튀김하고 남은 기름 다시 쓰려면 양파 이용

튀김하고 남은 기름은 버리기도 아깝고 다시 쓰자니 음식냄새가 나서 망설인적이 있으시죠. 음색냄새가 밴 기름을 다시 깨끗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양파를 조그맣게 잘라서 사용했던 기름에 넣어두면 양파가 음식냄새를 잡아줍니다.

 

 

7. 머리를 행굴 때 맥주를 넣으면 비듬 걱정 끝

머리를 감고 난 뒤 마시다 남은 맥주나 청주를 물에 타서 행구면 머릿결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비듬을 없애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뿐만아니라 식기나 유리를 닦을 때 사용해도 아주 잘 닦입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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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2일(월)부터 KBS에서 방영하는 "구르미 그린 달빛"을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청춘로맨스 드라마입니다.

주연은 "이영"의 박보검,"홍라온"의 김유정이 맡고요.

그 외 쟁쟁한 연기자들이 출연해서 벌써 많은 분들을 설레게 합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영"은 조선시대 실제 있었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를 말합니다.

드라마를 보기전에 실존인물이었던 효명세자에 대해 알고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겠죠.

 

효명세자에 대해 알아보기전에 약간 옆 길로 가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역사를 뒤돌아보면 조선의 중흥기를 만들어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의 역사를 다르게 만들수 있었던 안타까운 순간들이 많습니다.

중에 세가지만 나열한다면,

 

첫번째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의 죽음이 되겠습니다.

단종이 죽지않고 왕을 했으며 할아버지인 세종과 아버지인 문종의 엄청난 치적을 이어받아 지속적인 정책을 이어갔다면 조선초기 세종대의 번영에 버금가는 역사를 만들수 있었을 것입니다.

단종의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로써 단종을 낳고 하루만에 산후풍으로 죽고 맙니다.  

그로인해 단종을 확실히 지킬수 있었던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조선의 최고의 폭군인 연산군이 나왔고 중종반정으로 인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공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왕이 되어 세종대의 화려한 역사는 뒤안길로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정조의 죽음

많은 개혁정치로 조선의 부흥기로 만들수 있는 기회였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하고자했던 개혁정책이 물거품되어 또다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번째가 효명세자의 죽음

오랜만에 중전의 몸에서 태어난 세자로써 정통성을 가지고 아버지인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기간에 개혁정치를 통해 조선을 다시 일으키려 했으나 21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또다시 19세기 쇠락해가던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리고 기회를 잃어버리고 세도정치등 혼란스러운 정세속을 들어감으로써 조선은 결국 망하게 되었죠.

 

물론 역사속의 사건중에 실제와 다른 가정을 한다면 역사사실이 수없이 바뀔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따까운 역사의 기록이기에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효명세자는 23대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김조순의 딸)의 맏아들로 순조9년 1809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이다.

3세되던해 1812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장자로써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효명세자의 부인은 부사직(종5품 무반)조만영의 딸로써 10살 되던해인 1819년에 혼인하였다.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신정왕후 조씨로써 흔히 조대비라고 하면 아실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을 왕위에 앉힌 분이십니다.

드라마에서도 종종 나오죠.

 

                                                  드라마"명성왕후" 조대비

 

순조시대에는 정조가 승하하신후 19세기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이무렵은 안동김씨 일족이 권력을 쥐고 세도정치를 하였습니다.

국왕인 순조는 허울뿐인 왕이었습니다.

 

1827년 순조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합니다.

대리청정기간 젊은 미래의 국왕답게 인사를 단행하여 안동김씨 가문의 인물을 배제하고 참신한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하였습니다.

호적법을 재정비하고 형벌과 옥사를 신중하게 하고 민정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효명세자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 떄문에 가장 큰 업적은 문학과 예술분야에 뛰어난 성과를 남겼습니다.

궁중악의 큰 발자욱을 남겼는데 그가 대리청정한 3년동안 부왕과 모후를 위해 연회를 자주 열었는데 직접 궁중행사를 관장하고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직접 만들었다.

지금도 궁중무용으로 볼수있는 '장재무'를 다수 창작하였다.

이렇게 화려한 궁중행사를 자주 하였던 이유는 효심이 지극하기도 했지만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여 세도정치를 억제시키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21세 되던 1830년 윤4월에 안따갑게 생을 마감합니다.

그로인해 부왕인 순조가 4년뒤에 승하하신후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조선에서 가장 어린 나이인 7살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선국왕은 순조(10세),명종(11세),성종(12세),숙종(13세)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더욱더 세도정치는

심하게 되었습니다.

 

효명세자 사후 익종,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고 수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소재-풍수의 문제로 두번이 걸쳐 능을 옮김)에 신정왕후(1890년 고종27년에 돌아가심)와 합장되었다.

그러고보니 남편되시는 효명세자보다 60년을 더 사셨네요.

  

 

"구르미 그린 달빛"를 보실때 실제 역사와 비교해서 보는것도 또 다른 재미일것 같습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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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에서 방영하는 월화드라마"닥터스"의 후속으로 8월28일부터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가 방영된답니다.

드라마의 주된 내용은 고려 태조 이후 황권 경쟁 한복판에 서는 황자들과 고려 소녀 해수로 들어간 현대 여인 고하진 사이에 벌어지는 궁중암투와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주인공 이준기가 분한 역할이 "왕소" 나중에 고려 4대왕이 되는 광종이죠.

그런데 가만히 줄거리도 그렇고 주인공도 그렇고 어디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2015년1월에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빛나거나 미치거나"하고 비슷한것 같아요.

물론 왕소와 사랑을 나눈 주인공의 역할이 다르지만

"달의 연인"에는 아이유가 분한 "해수"는 8번째 왕자 왕욱의 아내 "해씨'의 육촌동생이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는 "고하진"의 영혼이 들어가있다고 하네요.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오연서가 분한 "신율"은 발해의 마지막 공주이고 청해상단을 운영하지요.

그리고보면 위 2가지 빼면 비슷한 점이 많아요.

재미는 있을것 같아요.

 

이처럼 고려 광종의 이야기가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거 보면 실제 드라마틱하게 평생을 사신 것 같아요.

그래서 고려 4대 광종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광종은 재위기간 노비안검법,과거제도,관복제정을 통해 왕권강화와 고려의 기초를 정비한 왕입니다.

또한 이로인해 많은 호족들과 왕족을 제거함으로써 피의 군주라고도 합니다.

 

고려를 개국할시 태조 왕건은 전국에 호족의 힘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개국공신이 무려 3,000여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태조 왕건 사후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종은 정종의 친아우이며 태조의 세번째 왕후인 신명순왕후 유씨의 아들이다. 어머니인 신명순왕후는 충주를 기반으로 하는호족 유긍달의 딸입니다.

 

 

충주를 외가로 둔 광종은 형인 정종보다 정치적 기반이 좋았다. 그 이유는 광종의 첫째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신정왕태후와 태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광종은 이복누이와 결혼한 것입니다.  고려초 가장 강력한 호족인 충주세력(외가)과 황주세력(처가)을 얻음으로써 든든한 배경을 두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부인은 경화궁 임씨로써 2대왕 혜종의 딸입니다.

왕실 족내혼을 한 첫번쨰 왕입니다.

 

고려왕실의 족내혼은 신라왕실의 족내혼 풍습과 같은 것으로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하였다.

광종은 25살이 되던해에 즉위하였다.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호족들에 의한 왕위쟁탈전을 몸소 보고 느껴기떄문에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호족들의 권한과 제거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광종은 즉위하면서 덕을 밝게 비춘다는 뜻의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선포하고 대내외적으로 고려를 황제국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 이면에는 왕위계승의 정통성과 왕권강화라는 목적과 함께 왕권강화를 위한 호족과의 전면전을 예고한것 입니다.

 

 

호족과의 첫번째 전면전은 956년(광종7년) 노비 해방에 가까운 '노비안검법'시행이었습니다.

그 당시 호족들이 소유한 사노비는 주로 전쟁포로,가난한 양민출신들이 많았습니다.

노비안검법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해서 전에 양민이었던 자들은 다시 양인으로 만들어주는 조치입니다,

그래서 귀족세력인 호족들의 힘을 누르고 왕권의 강화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호족세력의 반발은 엄청나게 심하였고 광종의 정비인 대목왕후  황보씨조차도 반대를 하였습니다.그러나 광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가 958년 광종 9년에 과거제도의 시행을 건의했다. 과거제도는 노비안검법보다 귀족들에게는 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과거제도 시행전에는 고려도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통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배경이었다.

그래서 기득권층인 귀족세력은 대대로 권력을 누렸기 때문에 광종은 과거제도의 시행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권력구조를 개편하여 왕권강화을 꾀할수 있었다.

물론 호족들의 반발은 거세었습니다. 그러나 광종은 따르지 않는 호족들은 모두 감옥에 가둘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과거제도 시행 2년후에는 관복을 제정함으로써 위계질서를 잡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별도의 관복을 제정하지 않다보니 신화들이 입궐시 입는 예복이 왕보다도 화려한 경우가 허다하여 왕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위해 신화들의 예복을 네가지 색깔로 직위를 구분할수 있도록 관복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광종의 재위기간을 정리해보자면 약한 왕권을 가진 혜종과 정종이 공신세력에 의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광종은 그전의 왕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공신세력을 축출하여 왕권강화에 힘쓰고 왕조의 기틀을 만들고

조금 과하다 할 정도의 기득권세력 숙청작업을 한 왕입니다.

그래서 광종은 피의 군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번 [달의 연인 보보심려 경]에서는 광종을 어떻게 다룰지

지켜봐야 겠네요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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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생활지혜 2016. 8. 10. 15:41

 

1. 감자 싹 나지 않게 하는 법

감자 속에 사과 한 개를 넣어두면 싹이 나는 것을 오랜 기간 억제할수 있음

사과의 에틸렌가스가 감자의 발육을 방해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감자 싹에는 솔라닌이라는 독소가 있어 섭취시 식중독에 걸릴 수 있음으로 요리하시기 전에 싹이 난 부위를 완전히 도려내어야 합니다.

 

2. 화장실 거울에 김이 서릴 때

화장실 거울에 김이 서리는 것을 막으려면 거울에 비누(주방세제) 칠을 한 후 마른 걸레로 닦아주면 거울 표면에 앏은 비누막이 생겨 김이 서리지 않게 됩니다.

 

 

3. 밀폐용기에서 냄새가 날 때

쌀뜨물을 하룻밤 정도 용기에 받아두었다가 다음 날 씻어주면 냄새는  물론

용기에 밴 색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냄새가 지독한 운동화를 빨 때도 쌀뜨물에 담갔다 세탁하면 발 냄새가 깨끗이 사라집니다.

 

4. 양파 손질시 매워서 눈물이 날 때

양파의 매운 성분을 뿌리 부분에서 나오기 때문에 껍질을 벗기고 나중에 뿌리를 손질하면 눈이 덜 맵습니다.

매운 부분이라고 뿌리를 자르지 마세요. 뿌리에는 혈액을 맑게하고 신장병과 당뇨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성분이 많습니다.

 

5. 우산에 녹이 슬었을 때

우산은 계속 젖은 상태로 보관하기 쉬어 녹이 슬기 쉽습니다.

녹이 슨 우산은 아세톤을 조금 묻혀 문질러 닦으면 깨끗하게 녹이 제거됩니다.

 

6. 고기를 먹고 체하였을 때

파인애플을 먹으면 금방 내려간다고 합니다.

파인애플은 고기를 연하게 해주기 때문에 갈비나 불고기를 잴때에도

파인애플을 이용하실수 있습니다.

물론 저희 회사에서 나오는 위생단큐 드시면 효과 바로 보시는데....

 

7. 오징어 튀기기

오징어 껍질을 완전히 벗긴 후 튀기면 기름이 튀지 않아 먹기 좋습니다.

그리고 오징어를 우유에 담가 두었다가 튀기면 더욱 맛이 좋답니다.

 

 

8. 달걀 흘렸을 때 닦기

소금을 뿌린 다음 10분 쯤 그대로 놔둔 후 닦아내면 달걀이 잘 닦아집니다.

 

9. 전화기 청소하기

식초를 두 세방울 떨어뜨린후 물로 닦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정전기가 발생하지않아 때가 덜 타기 때문입니다.

 

10.전구나 거울 조각을 깨뜨렸을 떄

대충 빗자루로 쓸어낸 다음 탈지면을 주먹 만큼 뭉쳐 바닥을 닦아내면 보이지 않는 유리가루까지 깨끗이 닦여집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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