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서 수목드라마"자체발광 오피스"후속으로 5월에 방영될 드라마

유승호,김소현이 남녀주인공으로 케스팅된 "군주-가면의 주인"에 벌써부터

관심이 많은데요.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재창조된 픽션 사극이라고 하네요.

그러면 어느 것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방영될지 궁금하네요.

그런데 남자 주인공인 유승호가 맡은 배역이 세자 이선이라고 하는데

그럼 실제 그런 분이 존재했는지 궁금하죠.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이름을 알아보자면

1 ;-태 조(太 祖), 이성계  1392 ~ 1398.

2 ;-정 종(定 宗), 이방과  1398 ~ 1400.

3 ;-태 종(太 宗), 이방원  1400 ~ 1418.

4 ;-세 종(世 宗), 이 도   1418 ~ 1450.

5 ;-문 종(文 宗), 이 향    1450 ~ 1452.

6 ;-단 종(端 宗), 이홍위 1450 ~ 1455.

7 ;-세 조(世 祖), 이 유   1455 ~ 1468.

8 ;-예 종(睿 宗), 이 황   1468 ~ 1469.

9 ;-성 종(成 宗), 이 혈   1469 ~ 1494.

10 ;-연산군(燕山君), 이 융  1494 ~ 1506.

11 ;-중 종(中 宗), 이 역  1506 ~ 1544.

12 ;-인 종(仁 宗), 이 호  1544 ~ 1545.

13 ;-명 종(明 宗), 이 환  1545 ~ 1567.

14 ;-선 조(宣 祖), 이 균  1567 ~ 1608.

15 ;-광해군(光海君), 이 혼  1608 ~ 1623.

16 ;-인 조(仁 祖), 이천윤 1623 ~ 1649.

17 ;-효 종(孝 宗), 이 호  1649 ~ 1659.

18 ;-현 종(顯 宗), 이 연  1659 ~ 1674.

19 ;-숙 종(肅 宗), 이 순  1674 ~ 1720.

20 ;-경 종(景 宗), 이 윤  1720 ~ 1724.

21 ;-영 조(英 祖), 이 금  1724 ~ 1776.

22 ;-정 조(正 祖), 이 산  1776 ~ 1800.

23 ;-순 조(純 祖), 이 공  1800 ~ 1834.

24 ;-헌 종(憲 宗), 이 환  1834 ~ 1849.

25 ;-철 종(哲 宗), 이 변  1849 ~ 1863.

26 ;-고 종(高 宗), 이 희  1863 ~ 1907.

27 ;-순 종(純 宗), 이 척  1907 ~ 1910.

 

 

위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역대 왕중에는 이선이라는 이름이 없고요.

왕이 안된 세자들중에 알아보니

이선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한 분이 있네요.

바로 정조의 아버지가 되는 비운의 사도세자의 이름이 이선이네요.

그럼 사도세자가 드라마 주인공일까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사도세자에 대해 잠깐 알아볼까요.

사도세자는 영조와 영빈이씨사이에서 태어나셨고

영조가 40세가 넘어 얻은 왕자라 어릴 때 영조의 기대 엄청 컸습니다.

2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0살때 홍경궁홍씨와 결혼하였습니다.

어려서는 문장과 글을 잘 지어 영특하다는 소리들 들었고

무예에도 소질이 있어 어릴 때는 군사놀이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완벽주의자였던 영조의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지 사도세자도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점점 영조의 기대에 따라가지 못하면서

더욱 관계가 안좋아졌고 당시 주류세력인 노론에 의해 결국 조선시대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임오화변(영조38년,1762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후 그의 아들인 정조에 의해 장현세자로 복원되었고 고종에 의해

왕(장조)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시 정치세력간의 문제 또는 개인적인 비행이 원인이지

역사가들의 의견이 아직도 분분하죠.

잠깐 사도세자의 일대기를 알아보았는데

드라마"군주-가면의 주인" 내용으로보아서는 세자 이선은 사도세자가

아니라 드라마에서 만든 이름일 것 같습니다.

실제 역사처럼 아니겠지만 드라마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일지도··········

앞으로 재미있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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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TV를 통해 본 만화영화는 오랫동안 머리속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요.

지금도 떠오르는 노래가 있네요.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푸른 바다 밑에서 잘도 싸우는

슬기롭고 씩씩한 용감스러운 마린보이  소년은 우리편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인어아가씨야  마음씨 고운 고래야 정말 고맙다.』

이 노래는 1970년대 MBC에서 방영한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의 주제가입

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본 만화영화를 TV에서 많이 방영하는데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역시 일본만화영화입니다.

1969년 일본 닛뽄 TV와 후지TV가 제작한 30분짜리 36회분의 TV만화시리즈

입니다. 국내에는 1979년 MBC에서 처음 방영하였습니다.

주된 내용은 마린보이가 인간세계와 바다속의 평화를 위하여 악의 무리와

싸우는 공상만화영화입니다.

마린보이가 가는 곳에는 항상 마음씨 고운 인어아가씨가 따르며 보살펴주고

착한 돌고래친구가 마린보이를 도와서 악의 무리를 무찌르지요.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주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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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도적으로 불리는 임꺽정

드라마,영화의 소재로 자주 나오듯이 가장 대중적인 임꺽정

SBS수목드라마"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도 이겸(송승헌)의 든든한 조력자로

나오죠.

실제 이겸의 조력자인지 역사에서는 명종시대의 활동한 내용만 있고 그전에

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수가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드라마 자체가 실제 역사와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에 재미를 위해

임꺽정을 넣은 것이겠지요.

임꺽정(林巨正. ?~1562)은 조선 명종시대 황해도을 중심으로 활동한 도적으

로 백정출신의 천민으로 당시 윤원형을 중심으로한 탐관오리로 인해

어렵게 살던 백성들에게 관청을 털어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단순히 도적

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찾는 권력자들에게 저항한 의적(義賊)입니

다.

명종실록에도 임꺽정의 난을 설명했는데

"오늘날 재상들의 탐욕이 한이 없어 수령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바침

으로 곤궁한 백성들이 하소연할 곳이 없어 도적이 안되면 살아갈 길이 없

다"

 

임꺽정의 난은 임꺽정은 백정출신이었지만 그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만의 통솔력으로 무리를 이끌

었습니다.

활동무대는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점차 시간이 흘러 따르

는 무리가 많아지면서 평안도,강원도,경기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황해도가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1559년(명종14년) 지역의 극심한 흉

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살 곳이 잃고 떠돌다가 도적이 될수 밖

에 없었기 때문이다.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수 있었던 것은 황해도 지역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

정을 도와 미리 관군들의 정보를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1559년(명종14년)에서 1562년(명종17년)까지 3년동안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주로 습격대상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 부를 축적한  관청,양반,토호의 집이었

으며 약탈한 재물은 백성들에 돌려주었고 관청을 습격하여 부정한 공권력에

항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을 얻어 활동할 수 있었습

니다.

권력자들에게는 공포와 불안의 대상이 되었기에 임꺽정을 단순히 도적이 아

닌 역모로 보고 왕의 특명으로 소탕하기위해 선전관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신출귀몰하게 쉽게 잡히지는 않았으나

결국 1562년(명종17년) 1월에 임걱정의 측근이었던 서림의 배반으로 토포사 

남치근이 이끄는 관군에게 잡히게 되면서 난은 평정되었습니다. 

과거나 현재도 주위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는가 봅니다.

그후 임꺽정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비록 임꺽정은 죽었으나 최고의 의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 대하소설 『임꺽정』

일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10여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역사소설

의 최고봉

작가는 독립운동에 힘썼던 홍명희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월북하여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내는 전력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 정식으로 출판되기까지는 금서로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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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任士洪) 조선시대의 간신으로 알려진 그도 처음부터 간신은

아니었습니다.

글씨는 당대 모두가 인정한 최고였으며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습니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이의(而毅) 입니다.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의 사위이고 세아들중 두 명이 각각 예종과 성종의

사위일 정도로 배경이 든든한 집안이었습니다.

1465년(세조11)에 문과에 급제하여 그 뒤 여러관직을 거쳐 특히 홍문관교리

재직시에 강직한 성품으로 직언을 하는 소신을 가지고 있어

성종의 총애를 받아 대사간,예조참의,승지,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중국말에능통하여 명나라사신을 하기도 하였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

쳤습니다.

 

그런 그도 삼사의 대간들이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

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으로 보면서 탄핵상소을 올리게 되고 처음에는 성종

이 앞장서 막아보았지만 계속되는 상소를 이기지 못하고 같은 당파였던

유자광과 함께 유배를 가게되고 더이상 성종시대에는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되고 와신상담 복수의 칼날을 갈아오다

드디어 연산군이 등극하자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은 재기에 성공하고

무오사화,갑자사화를 일으켜 자신들을 유배를 보낸 세력들에게 철저히

복수하게 됩니다.

연산군 당대에 연산군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를 통하여 집행하도록 할

정도로 절대신임을 얻어 무소불위에 권력을 휘둘렸습니다.

또한 영화"간신"에 나오듯이 조선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바치는 일

을 하는 채홍사로 임명되어 처음에는 소극적이 었으나 연산군이 압박하자

임사홍은 채홍사로 '운평','흥청'을 뽑아 연산군에 바칩니다.

그러던 그도 중종반정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되고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고

재산또한 몰수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유자광과 한배를 탔으나 중종반정직전에 유자광은

배를 갈아타고 중종반정의 공신이 되고 몰수된 임사홍의 재산일부를

유자광이 가져갔다고 하니 참 알수 없는 일이죠.

간신과 충신은 종이한장 차이라고 했는데

간신은 자기개인을 위한 것이고 충신은 자기보다 먼저 나라를 생각하는 정

의 차이라고 하겠죠.

그 역시 자기를 유배보낸 그들의 복수만을 생각하다보니 희대의 간신이

되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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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수목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 나오는 중종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중종은 1488년(성종 19)에 태어나 1544년까지 사신 분입니다.

성종의 둘째 아들이고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 입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입니다.

1494년에 진성대군으로 봉해졌고 1506년 9월 박원종,성희안 등이 반정으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의 부인은 12명이 되고 자녀는 9남11녀을 두었습니다.

왕후로는 세분이 계셨는데 단경왕후 신씨,정경왕후 윤씨,문정왕후 윤씨

있습니다.

단경왕후 신씨는 1499년(연산군 5)에 진성대군(훗날 중종)과 혼인하였으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로서 반정후 반정세력에 의해 살해되면서

반정공신들에 의해 강제 폐위되었습니다.

폐위된후 궁궐에서 쫓겨난 후에도 중종은 항상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정경왕후 윤씨가 중전으로 입궁하였고 12대 인종의 모후입니다.

정경왕후 사후 문정왕후 윤씨가 들어오는데 13대 명종의 모후이고

드라마"옥중화"에서 나오던 문정왕후가 바로 그 분입니다.

윤원형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기도 합니다.

 

중종반정후 중종은 연산군시대의 잘못된 일을 바로 세우는데 노력하였고

개혁의 일환으로 조광조 등 신진사대부를 등용하여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하려했으나 반정공신 즉 훈구파의 모함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신진사대부를 대거 숙청하게 됩니다.

신진사림세력이 숙청됨으로서 개혁정치의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그후에는 권신들의 권력투쟁으로 훈구파에게 끌려다니는 왕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배경으로한 윤원로,윤원형형제의 등장으로 윤원형의 횡

포가 시작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늘 정치적 혼란이 끊이지않았고 연산군시대만큼이나

옥사가 잇따라 일어납니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이상적인 정치를 펴려고 노력했으나

기묘사화 후에는 간신들이 판을 쳐서 말미에는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못했

습니다.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었으나 명종시대에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으로 이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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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대 왕중에 재위중 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던 왕이 두 분 계시죠.

연산군 과 광해군 이시죠.

그중 광해군은 당대에는 몰라도 지금 현재의 역사관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

시는 분이시죠.

오늘 알아볼 연산군은 당대에나 현재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시죠.

그러다보니 가장 많이 알려진 군주이며 드라마나 영화로도 가장 많이 나왔

던 왕이죠.

어찌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사신 왕이시죠.

지금 현재 방영중인 MBC월화드라마"역적-백성을 훔친 도적"또한 연산군시

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죠.

연산군에 대해 다시한번 알아보는 것도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중

에 하나이겠죠.

 

연산군은 1476년(성종 7)11월7일 조선의 9대왕인 성종의 맏아들로 출생하였

고,어머니는 원래는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으나 왕의 총애를 받아 중전의 자

리까지 오른 윤씨입니다.

연산군은 왕위승계과정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순조로웠으며 성종의 적장자

로서 이름은 융(㦕)이고 7살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2년 동안에 세자수업을

착실히 받아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않을 뿐더러 오히려 뛰어났다고 기

록될 정도로 학문적 소양은 높았습니다.

19세가 되던 해 성종이 승하하자마자 조선의 10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초기 연산군은 아버지인 성종대에 완성된 삼사(三司)즉 사헌부,사간원,

홍문관을 통한 왕권의 견제을 왕권의 약화로 보고 이런 구조를 혁파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집권초기시 국정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구축에 방해되는 것은 능상(凌上)으로 보고 이것을 척결

하는데 통치기간 전력을 기울여 처음에는 삼사를 점차 모든 신하들에게 적

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무오사화를 통해 간쟁과 감찰를 기본 임무로 하는 삼사의 기

능을 축소시킴으로서 왕권강화의 목적을 달성하여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본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강화된 왕권을 자기 욕망

충족과 해소를 위해 자유로운 왕권행사로 여겨 연회,음행,사냥,금표(출입금지

를 알리는 푯말),개인을 위한 민가철거,발언의 통제 등 많은 기행을 함으로

써 국정의 파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삼사의 통제로 무오사화을 일으켰다면 갑자사화를 통해 전체 신

하들의 통제로 까지 이어졌고 그로인해 모든 대신들이 연산군에게 멀어지

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왕권강화의 본래취지를 잃어버려 중종반정으로 조선 역사상 폐위

되는 군주가 되었죠.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고 두 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치세는 조선초 부강한 국가로 계속적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마감함으

서  이후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나 붕당의 시초가 되었으며 당쟁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난으로 국운이 쇠퇴하게 만들었

다.

끝으로 우리가 흔히 쓰는 '흥청망청'은 연산군의 기이한 여성편력에서

나온 말인데요.

연산군시절 흥청(興靑)은 궁에 들인 여인들을 높인 말이다.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해,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건강한 말을 뽑아

각 고을에서 관리했다. 기생의 명칭도 운평(運平)이라 하고 궁중에 들어가면

흥청(興靑)이라 불리며 신분이 올라갔는데, 잠자리가 임금의 마음에 들면 천

과(天科)흥청, 그렇지 못하면 지과(地科)흥청, 이도저도 아니면 반천과(半天

科)흥청이라 불렸다. 흥청과는 3백 명, 운평과는 7백명에 이르러 무려 1천여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놀았다네요.

그래서 백성들이 흥청이들과 연산군이 놀다가 망했다는 뜻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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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악한 일을 많이 한 여자를 세명 꼽으라면

장녹수,장희빈,정난정을 대부분 꼽을 것입니다.

MBS월화드라마"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나오는 장녹수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장녹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태어난 시기는 알수가 없습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천민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고

집안이 가난해서 시집을 여러 번 갔으며 나중에는 제안대군(예종의 둘째아

들)의 노비로 들어가 거기서 노비와 다시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다 제안대군의 눈에 들어 가무(歌舞)를 익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줌으로

써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연산군이 소문을 듣고 흥청(興淸-왕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기생)으로 뽑혀

궁궐에 들어오게 됩니다.

영리한 성품으로 연산군의 마음을 흔들어 입궁직 후 종4품의 숙원에서 이듬

해에는 종3품의 숙용으로 초고속 승진 할 정도로 총애를 얻게 됩니다.

연산군시대 유일하게 연산군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장녹수였지만

그녀와 그녀의 측근들은 권세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으며 연산군시대의

종말을 재촉하게 만듭니다.

오죽하면 장녹수의 노비들도 사대부에게 행패를 부릴 정도였으니······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시대는 끝나고 연산군폭정의 핵심이었던

그녀는 결국 참형으로 생을 마감했고

죽은 후에도 그녀의 시체에 분노한 백성들이 돌을 던져 돌무더기가 생길 정

도라고 하니 정말 비참한 말로였습니다.

후대에 사는 저희들에게도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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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많은 화가들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3대 화가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시대별로 나열하면 안견,김홍도,장승업이 되겠습니다.

그중 먼저 안견은 요즈음 방영하고 있는 SBS 수목드라마"사임당-빛의 일

기"를 통해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 안견 『몽유도원도』 -

안견은 조선초기인 세종때부터 세조때까지 활동한 화가입니다.

세종시절 정4품인 호군(護軍)으로 파격적인 승진한 것으로 보아 그의 능력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견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어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모르고

또한 그의 작품 역시 추정되는 그림은 다수 있으나

확실히 그의 작품이라고 인정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몽유도원도」가

유일합니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으로서 중국의 화풍에 다른 여러가지 화풍을 받아들여 새로운 화

화풍을 만든 것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거기에다 당대 김종서,신숙주,정인지,박팽년,성삼문 등 사대부들이 쓴 칭찬하

는 글이 친필로 붙어 있습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서예적 가치또한 높은 작품입니다.

「몽유도원도」는 왼편은 현실세계를 오른편에는 꿈 속의 도원세계를 그리고

현실세계는 정면을 바라보고 왼편의 도원세계는 위에서 보는 부감법으로 그

려졌다.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 덴리대학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으로 간 시기는 임진왜란때 인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견은 그 당시에도 가장 뛰아난 화가로 인정되었으며

사후에도 조선후기까지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 김홍도 『금강사군첩』 -

다음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천재화가인 김홍도에 알아보겠습니다.

1745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 입니다.

증조할아버지가 만호벼슬을 하신 것으로 보나 집안이 원래 무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김홍도는 1765년 영조가 71세 되던 해에 큰 잔치를

열었는데 이를 위해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갓 스물이 이었던 김홍도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을 보아서는 20살이전에 도화원 화원으로 들어간 것으

로 보입니다.

- 김홍도 『안릉신영』 -

그후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

았으며 그 인연으로 정조는 김홍도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수 있도록 적극

적으로 후원하게 됩니다.

"김홍도의 그림을 구하려는 자들로 인해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

다" 는 말이 전할 만큼 그림으로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그로인해 정조시대에는 사포서의 감목관,안동의 안기찰방,충청 연풍현감등

벼슬을 하였습니다.

많은 그림을 남기셨고 당대의 최고의 화가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늘 생활은 궁핍했고 건강도 좋지 안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로서는 낭만적이었지만 좋은 가장은 되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매우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다 키도 크고 성격또한 좋아 그를 보면 좋아하지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네요.

요즈음 세상에 태어났어도 최고의 화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김홍도가 그린 다양한 그림중에도 가장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풍속화이고 인물의 살아있는 듯한 묘사와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탁월하다

할 것입니다

- 김홍도의 풍속화 -

그의 풍속화를 통해 그 시대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어

사료적인 가치 또한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300여점의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호탕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조선시대의 마지막 천재화

가인 장승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장승업 『군마도』 -

1843년에 태어났고 1897년 55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어릴 때는 고아로 자라 그의 출생에 대해 정확한 자료는 없습니다.

본관은 대원(大元)이고 호는 오원(五園),취명거사(醉暝居士),문수산인(文峀山

人) 입니다.

그는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스스로 오원(五園)으로 할 만큼 화가로서의 자

부심은 강했습니다.

장승업은 이응헌의 집에서 기거하며 중국 유명한 화가들의 서화를 접하

고 그림에 눈을 뜨게 됩니다.

장승업은 산수,인물,화훼 등 다양한 소재를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짜임새

있는 구성과 개방된 공간,힘차고 능숙한 필법,강렬한 묵법과 섬세한 설채법

의 대조 등 그림전체의 생동감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에서 중국화풍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

고 합니다.

 

그래도 워낙 그림의 수준이 뛰어나 당시에는 제일의 "신품(神品)화가"로 칭

송받았습니다.

그는 망해가는 조선을 지켜보며 화가의 일생을 삶으로서 안견,김홍도가 실던

시대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안견,김홍도 못지않은 창작력과 고도의 세련미 넘치는 그림을 보여줍

니다.

장승업 또한 명성이 자자하여 정6품의 관직도 받고 고종의 명령으로 궁궐에

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성격이 워낙 자유분방하여 오래 궁에 있지못하

고 나와 고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합니다.

그리고 민영환,흥선대원군,민영익,오세창 등 당대의 유명한 인사들이

그를 후원하였습니다.


- 장승업의 작품 -

장승업은 19세기 말 암울했던 시대를 밝히는 찬란한 예술혼이었으며

조선말 회화사적으로 지대한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회화분야에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였습니다. 

그의 화풍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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