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은 1831년(순조31)에 전계대원군(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서자)의 셋째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이름은 변(),초명은 원범(元範),자는 도승(道升)입니.

1844년(헌종10)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철종의 생가 강화 용흥궁

즉위하자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851년에 대왕대왕비 가문의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며 그분이 철인왕후이다.

김문근은 왕의 장인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었다.

철종은 정치에 어둡고 친위세력이 없는 관계로 안동 김씨일파의 전횡으로 삼정 문란이

극도로 심하였고 각 지역에서 민란이 발생하였으나

철종은 속출하는 민란에 대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로인해 최제우가 주창한 동학사상은 무서운 속도로 파급되기도 하였다.

14년 간 재위기간 철종은 세도정치을 막지못하고 후일 여색에 빠져 병사하였다.

또한 부인은 8명을 두었으며 자식은 5남1녀입니다.

그중 왕자 5명은 요절하였고 1녀인 영혜옹주만이 남았다.

능은 예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소재)  

서삼릉 철종철인왕후예릉

 

posted by 위생단큐
:

본관: 고령(高靈)

출생 및 사망: 1691(숙종17)~1756(영조32)

이조판서를 지낸 박장원의 증손

아버지는 박항한 어머니 공조참판을 지낸 이세필의 딸

박문수라 하면 흔히 암행어사로 유명한데 실제 어사로 파견되었던 것은

4차례정도되는데 어사로 활동했는 것이 설화로 전해지면서

허구로 각색되어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 영조가 총애했던 신하였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1723(경종3)에 병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해 세자시강원설서.병조정랑에 부임하였고

1724(영조1)에 삭직되었습니다. 그당시는 노론이 집권할 때라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박문수는 소론이었거든요.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기 시작하면서

그해 어사로 부임하여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합니다.

그다음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로

1731년 어사로 다시나가고

1732년 선혜청당상

1734년 예조참판

1737년 도승지 역임뒤 병조판서

병조판서 재임시 병조에 있던 폐단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1738년 서원을 철폐시킨일로 탄핵받아 풍덕부사로 좌천

1739년 함경도관찰사

1741년 어영대장

1743년 황해도수군절도사

1745년 어영대장 재임

1749년 호조판서

1750년 수어사 역임

1751년 예조판서

1752년 왕손이 죽게되어 내의원제조로서 책임을 당해 제주로 귀양

1753년 우참찬

사후 영의정에 추증

많은 공직생활을 통해 많은 폐단을 없애고

어느 관료보다 일을 잘 처리했다고 합니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할 때 명문가의 중심에서 벗어나

폭 넓은 인재등용을 주장하였고 당파를 구분하지 말고

유능한 인재등용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군정과 세정에 탁월해 영조의 국정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


1997년 3월 6일 영덕군 장사해수욕장부근에서 난파선 한척이 발견되었다.

그 배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교란목적으로 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문산호였다.

그일이 계기로 장사상륙작전이 재조명되기 시작되었다.

장사 상륙 작전(長沙上陸作戰) 은 1950년 9월 14일~15일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이다. 작전명 174고지라고도 한다.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9월 15일 

새벽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대한민국군의 학도병으 로 구성된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장사

에 상륙하여 7번국도을 봉쇄하고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고 철수한 작

전이다. 인천 상륙 작전의 교란작전으로 실시되어 작전으로서는 성공하였다. 원래는 8군에 

떨어진 명령이었으나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 작전을 해 야 하는 사정상 북한 군과 외모가 비

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 게 작전명 174를 맡긴 것이다. 7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

을 입었으며, 사망한 학도병을 제외하면 행방불명 상태이다. 원래는 3일만에 귀환할 예정

으로 전쟁물자도 3일치만 지급되었다. 그러나 문산호가 좌초되어 돌아오지 못하

고 전쟁물자가 부족해진 가운데에서도 7번 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인천 상륙 작

전이 성공한 후 고립된 학도병들을 구출하러 배를 보냈지만,죽기 전까지 싸웠던 북한군 (북한

군 2개 사단 정예부대)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였고 더이상의 작전시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어 철

수 명령이 떨어졌다.

얼마전 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과 미국종군기자역할로 메간폭스가 출연한다고

화제였는데요.

개봉하면 보러가야겠어요.

 

posted by 위생단큐
:

          

홍콩 무협환타지 추억의 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

 

홍콩영화의 부흥을 알리던 작품으로 1987년에 제작

영화제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극이 했고요.

주인공은 장국영(영채신 분),왕조현(섭소천 분)입니다.

 

청나라시대 포송령의 요재지이라는 소설집에 나오는

섭소천에 대한 설화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간략하자면

명나라시대 영채신이라는 순진한 서생이 생활고로 어쩔수 없이

빚 수금원을 하던 중 부득이하게 난약사라는 절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난약사는 인간의 정기를 빼먹는 귀신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곳에서 연적하라는 퇴마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영채신에게 이 곳을 빨리 떠나라고 했는데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사악한 나무귀신의 양녀로 지나가는 남자를 유혹하는 귀신인 섭소천을 만나게 되는데 섭소천의 유혹에도 영채신은 넘어가지않고 오히려 섭소천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죠.

그리하여 둘은 진정한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나 연적하에 의해 섭소천이 귀신이라는 것을 알게된 영채신은

도망가려했으나 섭소천의 진심을 알게된 영채신은 환생을 하고 싶은 섭소천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사악한 나무귀신과 그 밖에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어렵사리 세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섭소천의 유골을 고향에 묻어주고 환생을 빌어줍니다.

 

이 영화는 섭소천으로 분한 왕조현이 전통의상을 입고 나오는 것이

정말 압권이죠.


그 당시 아시아의 최고의 미녀로 불릴만 했죠.

특수효과는 지금보면 우스운 장면도 많지만

 

주제가도 흥행의 일조하고 당시 홍콩영화제에서 주제가상도 받죠.


posted by 위생단큐
:

                       홍콩느와르의 정점 첩혈쌍웅

 

80년대 한국에는 홍콩영화가 엄청난 인기가 있었습니다.

97년 홍콩반환으로 홍콩사람들의 불안감,미래의 불투명을 반영한 홍콩느와르

영웅본색를 시작하여 그후 범죄세계를 다룬 총기액션물이 양산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부류의 영화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첩혈쌍웅에 대해 알아보러합니다.


1989년 작품

1990년 홍콩영화제 감독상,편집상 수상

감독: 오우삼

주연:주윤발(아쏭),엽청문(제니),이수현(리 경위)

 

그당시 홍콩액션영화가 그렇듯이 내용은 간단합니다.

인간미있는 킬러가 살인청부에 회의를 느끼고 그러다가 우연한 사고로 한 여자를 다치게해서

여자를 몰래 도와주고 자기를 쫓는 형사는 킬러에게 알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고 그를 도와주고 킬러는 마지막에는 상대세력과 싸우다 죽게 됩니다.

 

아쏭은 살인청부업자로 친구의 부탁으로 어느날 술집에서 살인청부를 아쏭은 총격전을 벌이던 중 그 곳에 있던 여가수 제니가 눈에 부상을 입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 죄책감으로 제니 주위에서 그녀을 지켜주고 서로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쏭은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한편 리경위는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형사로서 전철에서 흉악범을 쫓다가 심장질환을 앓은 인질이 죽게되자 문책을 받게 된다.

 

아쏭은 제니의 각막이식 수술비를 위해 마지막으로 살인청부를 맡게 되고 그 대상은

마약조직에 있는 토니 왕이었는데 토니왕의 경호를 리 경위가 맡게 되었습니다.

아쏭은 맡은 일을 처리하고 그 와중에 여자아이가 다쳐 병원에 데려다 준다.


아쏭을 쫓던 리 경위는 그런 아쏭의 모습에 묘한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리 경위는 아쏭을 수사하던중 제니의 존재를 알게되고 제니와 아쏭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던 중 아쏭의 거처를 알게되어 덮치는데 리 경위를 뒤 쫓던 토니 왕의 부하들이 아쏭을 죽이려하는데 아쏭과 리 경위는 힘을 합쳐 왕가의 부하들을 처치하고

그 와중에 부상을 당한 아쏭과 리 경위는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쏭:“때론 운명이라는 게 무섭지. 날 이해하는 사람이 경찰일 줄은 몰랐어....

자넨 전혀 경찰같지가 않아.“

리 경위: “자네는 킬러 같진 않아.”

 

마지막으로 아쏭은 교회에서 돈을 받기 위해 갔으나 리경위와 함께 거기에 있던 왕가의 부하들과 총격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가는 제니를 인질로 잡고 아쏭과 리경위는 총을 버리게 되죠.

아쏭은 리 경위에게 제니의 눈을 치료해달라는 말을 하고 총을 발사했으나 왕가의 총을 맞고 죽게 됩니다. 그러자 리 경위는 분노을 참지 못하고 경찰이 출동하였으나 왕가를 죽여버립니다.

O.S.T는 여주인공 제니를 맡은 엽청문이 부른 천취일생(천취일생)이 큰 인기가 있었죠



posted by 위생단큐
:


피비 케이츠,소피 마르소와 더불어 책받침 3대 여신이었던

브룩 쉴즈에 대해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196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브룩 크리스티나 쉴즈

학력은 프린스턴대학 프랑스어학과 졸업

배우자로는 테니스스타였던 안드레 애거시하고 1997년 결혼해서

1999년 이혼하였고 그후 2001년부터 현재까지 TV작가인 크리스 헨치와 살고 있으며

자녀로는 두 딸이 있습니다.

브룩 쉴즈는 뉴욕 최상류층 부부사이에서 태어났고

집안이 이탈리아 귀족 및 유럽왕실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귀족티가 줄줄 흐르는 거여구만

한때 모르코왕실에서 며느리로 점 찍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연예계 데뷔는 화장품회사의 대표였던 아버지 덕분에

19661살에 아이보리 비누 광고에 출연하였고

그 후 아역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2살에 영화프리티베이비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14살에는 보그 표지모델로 발탁되었습니다.

15살에는 캘빈 클라인 청바지 모델로 될 정도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미모와 우월한 몸매를 자랑하였습니다.

키가 183이니 기럭지는 길죠.


전 세계적으로 이름알리게 된 것은 피비 케이츠가 주연한 파라다이스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블루 라군에 출연하면서 부터이죠.


지금도 내용도 그렇지만 분위기도 비슷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 이후에도 많은 영화에 출연했는데

주로 연기력보다는 미모와 몸매를 강조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야심차게 준비한 영화 사하라에 출연하였지만 한계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아역배우스타가 성인이 되면 잘 안된다는 것이 브룩 쉴즈에게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고

그 후 그저그런 배우가 되고 맙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기념공연 때문에 한국에도 오기도 했죠.


인공수정 및 우울증약의 부작용으로 호로몬이상이 생겨 그 예쁘던 얼굴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죠.


지금 얼굴보면 소피 마르소보다도 어리지만 얼굴을 훨씬 늙어 보이죠.

배우는 역시 얼굴보다 연기력이 되야 오래가죠.

얼굴은 나이가 들면 어쩔수 없잖아요.

posted by 위생단큐
:


80년대 책받침3대여신인 피비 케이츠,소피 마르소,브룩 실즈

이번에는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1966.11.17.에 출생하였습니다.

벌써 우리 나이로는 52세가 되네요.

부모로는 베누아 모퓌,시몬 모퓌

아버지의 직업은 트럭 운전수

형제자매로는 실방 모퓌 오빠가 있고

배우자로는 안제이 주와프스키(1985~ 2001),짐 렘리(2001~ 2007),크리스토페 랑베르(2007~ 2014)이 있었습니다.

자녀로는 뱅상 주와프스키,줄리에트 렘리가 있습니다.

본명은 소피 다니엘 실비 모퓌


 

소피마르소는 14살 되던 해인 1980년 영화라붐”(클로드 피노토 감독)의 여주인공 오디션을 통해 연기경력이 전혀 없었는데 발탁되게 됩니다.


라붐라붐2”가 프랑스와 우리나라등 여러나라에서 엄청난 히트를 통해

세계적인 청소년스타로 일약 혜성처럼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한국 남학생들은 소피마르소에 열광하게 히죠.

뭐라할까 서양인인데 불구하고 동양의 청순가련미를 섞여놓았다고 할까?

그 당시 엄청났죠.

그 후 1984년에 개봉한 사강의 요새(Fort Saganne)"으로 프랑스의 오스카상인 세자르 여배우상을 수상합니다.


1988년 영화제목과 같은 OST가 유명한 유 콜 잇 러브로 특히 한국에서 히트를 하죠.

그 후에도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1995브레이브 하트” 1999“007 언리미티드

수 많은 작품에 출연하죠.


그래도 소피마르소 하면 라붐에서 나오던 여린 여학생의 모습이 워낙 강해

성인이후에 영화에서 나오는 모습과는 괴리가 많았죠.

벌써 연기경력이 37

그나마 50세 넘긴 나이에도 어릴적 모습이 남아 있으니 볼 때마다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릴수 있는 것 같아요.

 

소피마르소는 연기외에도 특이한 경력이 있는데요.

1996년에는 반자전적 소설거짓말하는 여자집필

2002년에는 사랑한다고 말해줘영화로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었죠.

1989년에는 드봉 한국화장품 광고 출연

201520회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

임권택감독의 취화선(2002)”을 무인도에 가져갈 영화로 꼽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쁘기만 배우가 아니라 의식있는 배우로도 유명하죠.

프랑스 정부가 사우디왕자에게 레지옹 도뇌르을 수여한 것에 대해 비판의 의미로

훈장수상을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원한 우리들의 이쁜 누님

곱게 늙네요.

posted by 위생단큐
:


1. 피비 케이츠(Phoebe Cates)

 

80년대 초중반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특히 남학생들에게

최고의 스타였던 피비 케이츠,소피 마르소,브룩 쉴즈

집에 책받침은 기본이고 브로마이드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죠.

저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피비 케이츠를 좋아했는데.

그럼 생년기준으로 63년생으로 가장 빠른 피비 케이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소피 마르소,브룩 쉴즈와 다르게 피비 케이츠는 동양인의 피가 섞여서 조금은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죠.

1963716일 뉴욕의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났고 외할머니가 중국계 필리핀사람이라서 동양인의 얼굴이 조금 보이죠.

원래 피비 케이츠는 발레리나가 꿈이었으나 부상으로 꿈을 접고

연예인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무명배우로 광고,방송에 출연하다 그녀의 출세작인 파라다이스(1982년 사라역)”을 통해... 특히 파라다이스”OST를 불러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 후 프라이비트 스쿨(1983)”,“그렘린(1984)에 출연하면서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1984년 이후에는 브로드웨이로 진출 많은 작품을 합니다.

1989년 케빈 클라인과 결혼하여 세명의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답니다.

피비케이츠는 소피마르소와 브룩쉴즈와 달리 청순함과 더불어 섹시함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 그리고 차인표의 아내인 신애라도 데뷔초 피비 케이츠 닮았다고 하기도 했죠.

지금은 이렇게 변했는데요.

나이를 먹어도 아직 이쁘네요.


posted by 위생단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