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느와르의 정점 첩혈쌍웅

 

80년대 한국에는 홍콩영화가 엄청난 인기가 있었습니다.

97년 홍콩반환으로 홍콩사람들의 불안감,미래의 불투명을 반영한 홍콩느와르

영웅본색를 시작하여 그후 범죄세계를 다룬 총기액션물이 양산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런 부류의 영화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첩혈쌍웅에 대해 알아보러합니다.


1989년 작품

1990년 홍콩영화제 감독상,편집상 수상

감독: 오우삼

주연:주윤발(아쏭),엽청문(제니),이수현(리 경위)

 

그당시 홍콩액션영화가 그렇듯이 내용은 간단합니다.

인간미있는 킬러가 살인청부에 회의를 느끼고 그러다가 우연한 사고로 한 여자를 다치게해서

여자를 몰래 도와주고 자기를 쫓는 형사는 킬러에게 알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고 그를 도와주고 킬러는 마지막에는 상대세력과 싸우다 죽게 됩니다.

 

아쏭은 살인청부업자로 친구의 부탁으로 어느날 술집에서 살인청부를 아쏭은 총격전을 벌이던 중 그 곳에 있던 여가수 제니가 눈에 부상을 입고 앞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 죄책감으로 제니 주위에서 그녀을 지켜주고 서로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쏭은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한편 리경위는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형사로서 전철에서 흉악범을 쫓다가 심장질환을 앓은 인질이 죽게되자 문책을 받게 된다.

 

아쏭은 제니의 각막이식 수술비를 위해 마지막으로 살인청부를 맡게 되고 그 대상은

마약조직에 있는 토니 왕이었는데 토니왕의 경호를 리 경위가 맡게 되었습니다.

아쏭은 맡은 일을 처리하고 그 와중에 여자아이가 다쳐 병원에 데려다 준다.


아쏭을 쫓던 리 경위는 그런 아쏭의 모습에 묘한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리 경위는 아쏭을 수사하던중 제니의 존재를 알게되고 제니와 아쏭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던 중 아쏭의 거처를 알게되어 덮치는데 리 경위를 뒤 쫓던 토니 왕의 부하들이 아쏭을 죽이려하는데 아쏭과 리 경위는 힘을 합쳐 왕가의 부하들을 처치하고

그 와중에 부상을 당한 아쏭과 리 경위는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쏭:“때론 운명이라는 게 무섭지. 날 이해하는 사람이 경찰일 줄은 몰랐어....

자넨 전혀 경찰같지가 않아.“

리 경위: “자네는 킬러 같진 않아.”

 

마지막으로 아쏭은 교회에서 돈을 받기 위해 갔으나 리경위와 함께 거기에 있던 왕가의 부하들과 총격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가는 제니를 인질로 잡고 아쏭과 리경위는 총을 버리게 되죠.

아쏭은 리 경위에게 제니의 눈을 치료해달라는 말을 하고 총을 발사했으나 왕가의 총을 맞고 죽게 됩니다. 그러자 리 경위는 분노을 참지 못하고 경찰이 출동하였으나 왕가를 죽여버립니다.

O.S.T는 여주인공 제니를 맡은 엽청문이 부른 천취일생(천취일생)이 큰 인기가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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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 케이츠,소피 마르소와 더불어 책받침 3대 여신이었던

브룩 쉴즈에 대해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196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브룩 크리스티나 쉴즈

학력은 프린스턴대학 프랑스어학과 졸업

배우자로는 테니스스타였던 안드레 애거시하고 1997년 결혼해서

1999년 이혼하였고 그후 2001년부터 현재까지 TV작가인 크리스 헨치와 살고 있으며

자녀로는 두 딸이 있습니다.

브룩 쉴즈는 뉴욕 최상류층 부부사이에서 태어났고

집안이 이탈리아 귀족 및 유럽왕실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귀족티가 줄줄 흐르는 거여구만

한때 모르코왕실에서 며느리로 점 찍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연예계 데뷔는 화장품회사의 대표였던 아버지 덕분에

19661살에 아이보리 비누 광고에 출연하였고

그 후 아역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2살에 영화프리티베이비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14살에는 보그 표지모델로 발탁되었습니다.

15살에는 캘빈 클라인 청바지 모델로 될 정도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미모와 우월한 몸매를 자랑하였습니다.

키가 183이니 기럭지는 길죠.


전 세계적으로 이름알리게 된 것은 피비 케이츠가 주연한 파라다이스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블루 라군에 출연하면서 부터이죠.


지금도 내용도 그렇지만 분위기도 비슷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 이후에도 많은 영화에 출연했는데

주로 연기력보다는 미모와 몸매를 강조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야심차게 준비한 영화 사하라에 출연하였지만 한계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아역배우스타가 성인이 되면 잘 안된다는 것이 브룩 쉴즈에게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오고

그 후 그저그런 배우가 되고 맙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기념공연 때문에 한국에도 오기도 했죠.


인공수정 및 우울증약의 부작용으로 호로몬이상이 생겨 그 예쁘던 얼굴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죠.


지금 얼굴보면 소피 마르소보다도 어리지만 얼굴을 훨씬 늙어 보이죠.

배우는 역시 얼굴보다 연기력이 되야 오래가죠.

얼굴은 나이가 들면 어쩔수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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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책받침3대여신인 피비 케이츠,소피 마르소,브룩 실즈

이번에는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1966.11.17.에 출생하였습니다.

벌써 우리 나이로는 52세가 되네요.

부모로는 베누아 모퓌,시몬 모퓌

아버지의 직업은 트럭 운전수

형제자매로는 실방 모퓌 오빠가 있고

배우자로는 안제이 주와프스키(1985~ 2001),짐 렘리(2001~ 2007),크리스토페 랑베르(2007~ 2014)이 있었습니다.

자녀로는 뱅상 주와프스키,줄리에트 렘리가 있습니다.

본명은 소피 다니엘 실비 모퓌


 

소피마르소는 14살 되던 해인 1980년 영화라붐”(클로드 피노토 감독)의 여주인공 오디션을 통해 연기경력이 전혀 없었는데 발탁되게 됩니다.


라붐라붐2”가 프랑스와 우리나라등 여러나라에서 엄청난 히트를 통해

세계적인 청소년스타로 일약 혜성처럼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한국 남학생들은 소피마르소에 열광하게 히죠.

뭐라할까 서양인인데 불구하고 동양의 청순가련미를 섞여놓았다고 할까?

그 당시 엄청났죠.

그 후 1984년에 개봉한 사강의 요새(Fort Saganne)"으로 프랑스의 오스카상인 세자르 여배우상을 수상합니다.


1988년 영화제목과 같은 OST가 유명한 유 콜 잇 러브로 특히 한국에서 히트를 하죠.

그 후에도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1995브레이브 하트” 1999“007 언리미티드

수 많은 작품에 출연하죠.


그래도 소피마르소 하면 라붐에서 나오던 여린 여학생의 모습이 워낙 강해

성인이후에 영화에서 나오는 모습과는 괴리가 많았죠.

벌써 연기경력이 37

그나마 50세 넘긴 나이에도 어릴적 모습이 남아 있으니 볼 때마다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릴수 있는 것 같아요.

 

소피마르소는 연기외에도 특이한 경력이 있는데요.

1996년에는 반자전적 소설거짓말하는 여자집필

2002년에는 사랑한다고 말해줘영화로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었죠.

1989년에는 드봉 한국화장품 광고 출연

201520회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

임권택감독의 취화선(2002)”을 무인도에 가져갈 영화로 꼽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쁘기만 배우가 아니라 의식있는 배우로도 유명하죠.

프랑스 정부가 사우디왕자에게 레지옹 도뇌르을 수여한 것에 대해 비판의 의미로

훈장수상을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원한 우리들의 이쁜 누님

곱게 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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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비 케이츠(Phoebe Cates)

 

80년대 초중반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특히 남학생들에게

최고의 스타였던 피비 케이츠,소피 마르소,브룩 쉴즈

집에 책받침은 기본이고 브로마이드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죠.

저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피비 케이츠를 좋아했는데.

그럼 생년기준으로 63년생으로 가장 빠른 피비 케이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소피 마르소,브룩 쉴즈와 다르게 피비 케이츠는 동양인의 피가 섞여서 조금은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죠.

1963716일 뉴욕의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났고 외할머니가 중국계 필리핀사람이라서 동양인의 얼굴이 조금 보이죠.

원래 피비 케이츠는 발레리나가 꿈이었으나 부상으로 꿈을 접고

연예인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무명배우로 광고,방송에 출연하다 그녀의 출세작인 파라다이스(1982년 사라역)”을 통해... 특히 파라다이스”OST를 불러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 후 프라이비트 스쿨(1983)”,“그렘린(1984)에 출연하면서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1984년 이후에는 브로드웨이로 진출 많은 작품을 합니다.

1989년 케빈 클라인과 결혼하여 세명의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답니다.

피비케이츠는 소피마르소와 브룩쉴즈와 달리 청순함과 더불어 섹시함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 그리고 차인표의 아내인 신애라도 데뷔초 피비 케이츠 닮았다고 하기도 했죠.

지금은 이렇게 변했는데요.

나이를 먹어도 아직 이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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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조선의 비애 병자호란

 

최근에 개봉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에 대한 영화인데요.

병자호란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려 합니다.

병자호란은 1636(인조14)12월부터 1637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2차 침략전쟁입니다.

17세기 초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는데

후금에 후에 청나라가 됩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은 명나라를 압박하는데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광해군은 망해가는 명나라에 기댈것이 아니라 실리적 중립외교로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광해군의 정책이었던


중립외교 또한 폐기되고 인조는 배금친명(후금을 배척하고 명나라받든다.)정책을 취하게되고 또한 조선에 있던 명나라군대를 지원까지 하게됩니다.

그리고 인조반정에 기여한 이괄이 후에 공을 인정받지못한 불만으로 난을 일으키는데 진압이 되었으나 이괄을 따르던 일부세력들은

후금에 가서 지금이 조선에 전쟁을 일으킬 기회라며 부추기게 되어

광해군폐위을 문제삼아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1차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입니다. 그리하여 강제적으로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그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원군요청,국경지역에서의 약탈 등 조선에 부당한 요구를 함으로서 후금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후 1636년에는 용골대,마부태 등이 후금의 사신으로 오는데

그들은 군신의 예를 강요하여 조선내의 척화론이 높아지게 됩니다.

용골대,마부태등은 조선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낌새을 알게되어

도주하였는데 조선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문서를 가져가됨으로서 조선이 후금을 대하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게되었으며

후에 후금이 청나라로 되면서 조선의 사신에게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사죄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그동안의 무리한 요구로 척화론이 높았기 때문에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청나라는 왕자뿐만아니라 척화론자들까지 청나라로 보내라는 최후통첩을 하였으나 조선조정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163612월에 2차전쟁이 일어나게되고 그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청태종은 직접 12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데

초기 임경업장군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쉽게 되지않자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바로 한양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전쟁을 시작한지 10일만에 한양에 오게됩니다.

조선조정도 다급하게 왕실가족과 일부 신하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인조또한 강화도로 가려했으나 청나라군대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세자와 같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후에 남한산성에 지리적 불리함을 알고 인조일행은 다시 강화도로 가려했으나 인조가 몸이 불편하여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영화에서처럼 13,000명의 군사로 성을 지키게 하고 각 도의 관찰사에게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고 명나라에 구원요청을 하였으나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들이 이끄는 군대는 남한산성에 오기도전에 청나라군에게 무너지게 됩니다.

명나라 또한 구원병을 보낼 처지가 안됩됩니다.

또한 성안에는 50일 정도 버틸수 있는 식량밖에 없어

큰 싸움은 없었으나 서서히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조정에서는 점점 강화론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조판서 김상헌,이조참판 정온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데 됩니다.


거기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왕실가족들이 청나라군대에 볼모로 잡히게 까지 되자 더 이상 버틸수 없다는 알게 되어

화의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과정에 예조판서 김상헌,이조참판 정온은 반대자결을 하려했으나 실패합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는 안 죽어요.

그리해서 이조판서 최명길에게 국서를 쓰게하고


최명길,홍서봉,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청나라에게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청나라 사신으로 용골태,마부태가 산성을 왕래하여

항복의 조건을 제시한 결과 굴욕적인 조약에 합의하게 된다.



16371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을 통해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태종 앞에서 항복의 표시로 ‘39고두(상복을 입고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아 그소리가 단 위에 있는 청태종에게 들리게 하는 것)’하고 병자호란은 종식된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병자호란으로 인해 고통은 가중되게 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지금 대한민국과 조선의 상황이 똑같지 않을까?

현재와 조선 당시의 위정자들 또한 어쩜 똑같지 않을까?

과연 진정 국민과 백성을 생각하는 위정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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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MBC월화드라마왕은 사랑한다의 주인공인 왕원(임시완분)

훗날 충선왕으로 불리는 실존인물입니다.

역사적으로 충선왕은 최초로 원나라의 피가 섞인 혼혈왕이고

원간섭기에 개혁정치를 하려했고 원나라와 고려의문화교류를 촉진하는등

잘 한것도 있지만 실제 고려의 입장에서는 평가가 아주 좋지않은 왕입니다.

충선왕(왕원)의 아버지는 충렬왕 어머니는 원나라 황제(세조)의 딸인 제국대장

공주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장 몽골이름은 이지리부카입니다.

12773살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자 반식민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충렬왕보다 어머니인 장목왕후의 영향력이 훨씬 컸기 때문에

충선왕 역시 어릴적 어머니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습니다.

또한 아버지 또한 자신의 신세를 알기에 늘 사냥등 방탕한 생활을 하게되어

충선왕은 그런 아버지를 싫어 했습니다.


그 후 1295년 충렬왕을 대신하여 왕권대행을 하다 원나라로 가게되고

원나라에서 원나라 공주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게 됩니다.

혼인식에 참석했던 어머니인 장목왕후는 고려로 귀국한지 얼마안되

병사로 죽게되어 고려로 돌아온 왕원은 충렬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총애한 후궁 무비와 아버지를 따르는 세력을 어머니를 죽게했다는 

이유로 참살하고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선위하자 1298년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충선왕은 초기에 인사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권력기구로 사림원을 만들고

당시 기득권세력의 많은 토지소유문제와 양민 착취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고려의 옛 제도를 복원하려는 등 자주적인 개력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개혁은 기득권세력의 반발을 불러 충선왕의 약점을 이용하여 

왕위에서 내몰기위해 혈안이 됩니다.

충선왕 역시 원나라공주인 왕비와 사이가 좋지못했으며 그의 아버지인 충렬왕

이 그렇듯이 많은 후궁을 거느리게 됩니다.

기득권세력들은 왕비의 질투심을 유발시켜 결국은 충선왕과 왕비는 원나라로 

불려들어가게 되고 아버지인 충렬왕이 복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충렬왕의 세력들은 충선왕의 복위가 두려워 계략을 꾸미게 되는데

충선왕의 왕비를 이혼시켜 24대원종의 손자인 왕전과 결혼을 해 왕전을 왕위

에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는 권력교체기이었는데 충선왕과 충렬왕이 지지하는 세력

이 달라는데 충선왕이 지지하는 세력이 황위에 오르게되어 충선왕은 든든한 

후원세력을 업게되고 충렬왕의 세력들을 숙청하게 되어 아버지인 충렬왕은 허

수아비왕이 되고 맙니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고려 왕으로 복위합니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며 고려를 통치를 하게되고

그또한 아버지인 충렬왕처럼 고려왕의 한계를 느껴서인지 몰라도 같은 행적을 

걷게 됩니다그 또한 아들을 못 믿고 세자를 따르는 세력을 숙청하면서 자신

의 정치적입지를 다집니다.

원나라황제조차도 그만 고려로 돌아가라 했으나 돌아가지않고 둘째 아들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원나라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양위를 하였어도 계속적 국정에 간섭을 함으로서 혼란만 가중시켰습니

.


원나라에서 학문연구기관인 만권당을 만들어 소일하다 원나라의 정치사정이 

변함에 따라 유배를 가게 되고 그후 유배가 풀려난뒤 원나라에서 1325년에 사

망하게 되고 사망한 후에 고려 돌아가고 개성 서쪽 덕릉에 묻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충선왕은 진정한 고려의 왕이 아니었고 그저 백성은 왕위를 유지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과연 드라마에서는 충선왕이 실제 역사와 어떻게 다르게 그려지는도 보는 재

미의 하나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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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tvn토일드라마"명불허전"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데요.

이 드라마에서 김남길이 맡고 있는 허임은 실존인물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많이 알려진 생소한 분이지만

실존인물이라고 하니 어떤 인물이었나 알고 드라마를 보는것도 하나의 재미이겠죠.

성이 허씨이다보니 허준과 무슨 친인척관계가 아닌가 했더니

전혀 관계가 없네요.

허임은 1570년부터 1647년까지 사신 분입니다.

허준은 1539년에서 1615년까지 사신 것이니깐

30여년 차이가 나죠.


전라도 나주의 노비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병으로 인해 의원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깨넘어로 의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특히 침구술을 배우는데 힘을 기울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침구술은 중국에서도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약관의 나이로 의과에 합격하였으나 출신이 미천하여

말단을 전전하며 혜민서의원을 하게됩니다.

그러다가 당시 어의였던 허준의 추천으로 선조의 편두통을 고쳐 그 공으로

6품에서 당상관인 정3품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됩니다.

그 후 광해군 시절에는 영평현령,양주목사,부평부사,남양부사를 역임합니다.

그 시절 조선에서 으뜸가는 침의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말년에는 자신의 의료활동경험을 토대로 침구학의 기초,치료경험 또한

종전에 쓰여진 한의서에 잘못된 침혈의 위치와 침혈을 잡는 방법을 집대성한

침구경험방을 집필합니다.

그리고 그만의 침구보사법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의원이자면

약재와 탕재는 허준

침과 뜸에는 허임이라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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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이장군 제 3 땅굴편 주제가 (Movie, 1978)

- 작사, 작곡 : 정민섭

- 노래 : 최은정, 최원정, 전수진

 

똘이장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똘이장군 앞서 간다 겁낼 것 없다

덤벼라 덤벼라 붉은 무리 악한 자들아

무쇠 같은 주먹이 용서 못한다

용서 못한다

 

그 이름 무적의 똘이장군

그 이름 정의의 똘이장군

나간다 달린다 똘이장군

똘이장군 만만세

 

똘이장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똘이장군 앞서 간다 겁낼 것 없다

왔노라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똘이장군 가는 길 승리뿐이다

승리뿐이다

 

그 이름 무적의 똘이장군

그 이름 정의의 똘이장군

나간다 달린다 똘이장군

똘이장군 만만세

 

출처: http://express999.tistory.com/145 [銀河鐵道의 끝없는 여행]

 

70년대 남북한의 이념대결이 치열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 반공에 대한 내용으로한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하던 시절이었죠.

만화영화도 마찬가지였는데요.

특히 똘이 장군은 7810월 제3땅굴이 발견되면서 만화영화로 제자되었는데 부제가 3땅굴이었습니다.

감독은 김청기(로보트태권브이로 유명하죠)

각본은 조항리

제작사는 ()서울동화,소년한국일보,새소년사

배급사는 ()서울동화

 

제작사,배급사 이름보니 참 오랜된 만화영화이네요.

내용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똘이는 금강산에서 숲 속의 동물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지내는데,

북한 공산당은 김정일의 생일 맞춰 산삼 50뿌리를 캐 바치는 내각결정 78호를 공포하고 여주인공인 숙이는 산삼캐는 것이 위험하다고 애기하다 내일까지 산삼세뿌리를 가져오지 못하면 퇴학당할 것이라고

말을 듣게 되고 산삼을 급하게 캐던 숙이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숲 속에서 살던 똘이가 숙이를 구하고 숙이대신 산삼을 구해주며

친구가 됩니다.

 

 

붉은 공화국은 전 국토의 요새화를 위해 주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심한 노동으로 하나둘씩 주민들은 쓰러져간다.

그러던 중 숙이의 엄마도 쓰러진다.

똘이는 동물친구들과 함께 대신 숙이엄마가 해야할 일을 해주고

주민들을 괴롭히는 여우 부대장을 혼내주고 숲으로 돌아간다.

한편 붉은 수령은 주민들은 굶는데 아편밀수로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그리고 붉은 여우에게 제3땅굴은 빨리 완성하도록 지시하고

박쥐부대를 남한으로 보내 평화와 자유를 파괴하도록 한다.

 

똘이의 엄마는 똘이가 어릴 때 탈북하다 붉은 늑대에게 죽음을 당하고 아빠는 현재 붉은 늑대에게 잡혀 제3땅굴파는데 동원되어 있었다.

똘이는 숙이와 숙이의 엄마를 보며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똘이의 아빠는 고된 노동속에서 똘이를 그리워하고

붉은 공화국은 노동에 비해 부족한 식량를 주고 주민들의 착취로

땅굴파기에 동원한다.

 

또한 부모가 땅굴파기에 동원된 아이들은 탁아소에 맡겨지고 굶주린다. 아이들은 붉은 수령을 아빠로 섬기게 만들기 위해 15일 탁아소에 있어야 단 하루 집에 갈수 있다.

숙이가 동생을 집으로 데려가려하자 붉은 늑대와 여우는 이를 막아서고 똘이가 나타나 동생을 데려가게 해주고 붉은 늑대와 여우를 혼내준다.

 

숙이의 아빠는 땅굴파는 현장에서 도망치다 붉은 여우의 총에 맞아 죽게되고 아빠대신 숙이가 땅굴파기현장에 끌려간다.

그런데 남한으로 보냈던 박쥐부대가 자유에 이끌려 모두 자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붉은 수령은 직접 땅굴파기현장를 독려하기위해 직접 붉은 여우와 함께 현장에 방문한다.

숙이는 땅굴파기현장에서 똘이의 아빠를 만나고 똘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똘이는 동물친구들과 함께 숙이를 구하고 주민들과 함께 붉은 수령과 여우를 격퇴한다.

여기서 붉은 수령은 똘이의 공격으로 본 모습인 새끼돼지가 되어 도망간다.

마지막으로 똘이는 아빠와 만나고 주민들과 함께 자유대한으로 향한다.

똘이장군은 그 당시 초등학생과 유아들에게 반공,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 영화입니다.

당시 기억으로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뒤로도 간첩잡는 똘이장군›‹암행어사 똘이›‹공룡백만년 똘이시리즈로 이어졌습니다.

영화흥행도 흥행지만 주제가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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