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인 19세기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탐관오리의 부정이 심하였고 농민과 일반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지면서
농민은 종전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항거,봉기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지배층에 대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 1811년(순조 11)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알아보겠습니다.
특히 홍경래의 난이 관심있는게 지금 방영하고 있는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김유정이 하고 있는 홍라온이 홍경래의 딸이 아닌가 하게하는 장면이 많이 나와서 그런거 같습니다.
홍경래는 평안북도 용강군 다미면에서 1771년(영조 47)에서 태어나 1812년(순조 12)까지 사신 실존인물입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외숙 유학권에게 학문을 배웠고 평양향시를 통과하고 유교와 풍수지리를 익힌 지식인이었습니다.
입신양명을 위해 1798년(정조 22)사마시에 대과를 보았으나
낙방하였습니다.
그외 가족관계나 어디서 살았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한양에서 시행되었던 대과에서 시골선비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에 출진하기가 어려웠고 더욱이 평안도 서북출신인 홍경래에게는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조선초 서북출신(평안도)들은 고려의 유민으로 구분되어 등용되지 못했고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지역감정이지요.
대부분의 고위관리들은 영남,호남,호서출신들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재까지 되고있는 지역감정은 그 유래를 찾자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봐야죠.
옆길로 새고 있네요.
대과에 낙방하였으나 과거를 치룰만큼 경서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지녔고 병서(兵書)나 제반 술서(術書),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하였다.
다시말해 홍경래는 이런 현실에 낙담하여 부패한 세상을 바꿀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하였다.
정치적으로 치열했던 당쟁의 시대가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김씨 일족의 세도정치가 성립되어 삼정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촉진시켰고 특권 상인과 지방 상인간의 대립도 심하게 되었다.
조선은 전국의 지방을 8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8도 가운데 조선 지배층의 대부분은 삼남지역이라고 하는 영남,호남,호서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조선의 북부지방인 함경도와 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단, 함경도는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지역으로 왕가의 탄생지로 인식되어 그나마 중앙정부의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평안도는 그렇치 못하였다.
물론 조선 정부에서 지방민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평안도 지역 일부인사를 특채로 채용하기도 했으나 다른 지방에 비해 미미했다.
평안도의 지역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홍경래의 난이 봉기할 때 쓴 격문의 내용을 보시면 쉽게 이해가 갈수 있다고 봅니다.
"조정에서는 서토(西土-평안도)를 버림이 더러운 땅과 다름이 없다.심지어 권세가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평민놈이라 일컫는다.서토에 있는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는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지하고 또한 과거를 볼때는 반드시 서토의 문장을 빌었으니 400년 이래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그래서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에서 평안도는 300년이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 사대부는 이들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랜 기간 소외되었던 평안도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며 변화의 기운을 맞이하였다.
변화는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유상(柳商-평양상인),만상(灣商-의주상인)을 중심으로 대청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18세기 후반에는 광산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잠채(潛採)라하여 불법적인 형태로 채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수탈은 점차 가중되며 사회적인 모순은 확대되어 갔다.
홍경래는 풍수로써 전국 각지를 돌며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삼정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해 직접 체험하며 인식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풍수로 부호의 집을 드나들던 우군칙을 만나 뜻이 통하자 반란을 모의하게 되었다.
그는 현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향촌에서 부를 축적하여 하층지배자로 진출한 계층과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에 접근 하였다.
그리고 관로가 막혀 현실에 부만을 품고 있던 양반지식층에 접근해 진사 김창시 등을 반란군에 동참시켰고 우군칙과 가깝게 지내던 이희저를 이용해 대상(大商)들의 후원금을 받도록 하였다.
즉 정주성의 거부 이침,김석하, 안주상인 나대곤, 송상 박광유.홍용서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 었다.
역사(力士)의 발굴에도 힘써 제상 홍총각,평민 이제초 등의 장수 그리고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 등을 동참시켰다.
그리하여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10여년간 준비하여 1811년(순조 11) 대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홍경래의 난 봉기이념은 《정감록》에 나오는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과 토호관속을 향해서는 지역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 초기에는 각지의 내통세력의 도움으로 민폐를 끼치지않고 군율에 따라 쉽게 가산,곽산,박천,태천 등 등 7개읍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난 주도세력안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홍경래마저 부상을 당하는 등 사태가 불리해지고 주도세력안에 홍경래를 암살하여 정부군에 공을 세우려는 배반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가운데 박천,송림전투에서 토벌군에게 패배하여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정주성에서 4개월간 버티었으나 땅굴을 파들어가 성을 파괴한 토벌군에게 결국 성은 함락되고 홍경래 또한 총을 맞고 죽고 만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어린 소년을 제외한 1,917면 전원이 일시에 처형되었고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한양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농민 봉기와 달리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기 충분합니다.
난의 실패원인을 요약하자면 토지문제,신분제철폐 등 사회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단지 곡식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은 당시 사회발전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한 지식인과 장사들이 주체적으로 봉기했다는 점에서 후기 지배체제를 허물어가는데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그후에도 사회변혁세력들은 민초들의 희원을 담아 홍경래가 죽지않고 섬에서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후대의 평가는 6.25 이전에는 당쟁사적 관점에서 단순히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 혹은 이를 이용한 횽경래 개인의 정권탈취기도로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이후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성장한 향촌의 부호,경영형 부농,서민지주,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지식인 등이 광산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농민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홍경래의 난을 애기할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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