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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13 :: 약소국 조선의 비극 "병자호란"

약소국 조선의 비애 병자호란

 

최근에 개봉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에 대한 영화인데요.

병자호란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려 합니다.

병자호란은 1636(인조14)12월부터 1637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2차 침략전쟁입니다.

17세기 초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는데

후금에 후에 청나라가 됩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후금은 명나라를 압박하는데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광해군은 망해가는 명나라에 기댈것이 아니라 실리적 중립외교로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광해군의 정책이었던


중립외교 또한 폐기되고 인조는 배금친명(후금을 배척하고 명나라받든다.)정책을 취하게되고 또한 조선에 있던 명나라군대를 지원까지 하게됩니다.

그리고 인조반정에 기여한 이괄이 후에 공을 인정받지못한 불만으로 난을 일으키는데 진압이 되었으나 이괄을 따르던 일부세력들은

후금에 가서 지금이 조선에 전쟁을 일으킬 기회라며 부추기게 되어

광해군폐위을 문제삼아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1차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입니다. 그리하여 강제적으로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그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원군요청,국경지역에서의 약탈 등 조선에 부당한 요구를 함으로서 후금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후 1636년에는 용골대,마부태 등이 후금의 사신으로 오는데

그들은 군신의 예를 강요하여 조선내의 척화론이 높아지게 됩니다.

용골대,마부태등은 조선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낌새을 알게되어

도주하였는데 조선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문서를 가져가됨으로서 조선이 후금을 대하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게되었으며

후에 후금이 청나라로 되면서 조선의 사신에게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사죄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그동안의 무리한 요구로 척화론이 높았기 때문에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청나라는 왕자뿐만아니라 척화론자들까지 청나라로 보내라는 최후통첩을 하였으나 조선조정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163612월에 2차전쟁이 일어나게되고 그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청태종은 직접 12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는데

초기 임경업장군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쉽게 되지않자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바로 한양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전쟁을 시작한지 10일만에 한양에 오게됩니다.

조선조정도 다급하게 왕실가족과 일부 신하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인조또한 강화도로 가려했으나 청나라군대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세자와 같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후에 남한산성에 지리적 불리함을 알고 인조일행은 다시 강화도로 가려했으나 인조가 몸이 불편하여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영화에서처럼 13,000명의 군사로 성을 지키게 하고 각 도의 관찰사에게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고 명나라에 구원요청을 하였으나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들이 이끄는 군대는 남한산성에 오기도전에 청나라군에게 무너지게 됩니다.

명나라 또한 구원병을 보낼 처지가 안됩됩니다.

또한 성안에는 50일 정도 버틸수 있는 식량밖에 없어

큰 싸움은 없었으나 서서히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조정에서는 점점 강화론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조판서 김상헌,이조참판 정온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데 됩니다.


거기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왕실가족들이 청나라군대에 볼모로 잡히게 까지 되자 더 이상 버틸수 없다는 알게 되어

화의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과정에 예조판서 김상헌,이조참판 정온은 반대자결을 하려했으나 실패합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는 안 죽어요.

그리해서 이조판서 최명길에게 국서를 쓰게하고


최명길,홍서봉,김신국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청나라에게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고 청나라 사신으로 용골태,마부태가 산성을 왕래하여

항복의 조건을 제시한 결과 굴욕적인 조약에 합의하게 된다.



16371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을 통해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태종 앞에서 항복의 표시로 ‘39고두(상복을 입고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박아 그소리가 단 위에 있는 청태종에게 들리게 하는 것)’하고 병자호란은 종식된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병자호란으로 인해 고통은 가중되게 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지금 대한민국과 조선의 상황이 똑같지 않을까?

현재와 조선 당시의 위정자들 또한 어쩜 똑같지 않을까?

과연 진정 국민과 백성을 생각하는 위정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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