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도 광해군이 지금 재평가를 받고 있

는 것처럼 혹독한 폭군이아니라 기존의 틀을 개혁하려던 개혁가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던 폭군의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다 이 말이지요.

연산군에 대한 글은 전에 올린 것이 있는데 올린 글과 사뭇 다른 내용이 있

어 새로 알게된 연산군의 이야기를 써보렵니다.

 

연산군 초기 왜구와 야인의 토벌을 위해 비융사(훗날 비변사의 전신)을 설치

하고 상설회의 개최와 병기 개량을 하였고 평안도와 함경도지방의 방어를

확충하고 국경지역으로 이주를 늘리기 위해 이주 독려와 면세,

부역면제 정책  등을 시행하였습니다.

빈민의 구제에도 힘써 사창,상평창,진제창 등 빈민구제기구을 설치

「국조보감」,「동국명가집」 등을 간행하고 「역대제왕시문잡저」,「속국조보

감」,「여지승람」을 완성 하였습니다. 

 

세자시절 스승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연에 자주 참석.

압반(의정부 소속의 고관)과 사헌부 감찰을 동원하여 당시 물란하였던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규찰,감시하였고

의정부의 정4품직 사인,검상,이조와 병조의 낭관 의 관직에는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 쓰는 정책을 시행하여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지.

사가독서(임금의 명으로 직무를 쉬면서 글을 읽고 학문을 닦는 제도)부활

요즈음으로 말하면 유급휴가이네요.

연산군은 정무를 보좌할 때는 정승이라고 해도 직함 뒤에 존칭을 생략

즉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좋은 정책이 나온다고 생각하셨는가봐요.

명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교의 복잡한 의례를 배격하고 간소하고 실질적인 절차만을 권장

또한 공자묘에 절하지 않겠다는 선언등 개혁적 조치 단행

실질적인 중종반정의 계기는 연산군의 이 같은 개혁적 조치가

아마 성리학을 바탕을 둔 조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평가도 있습니다.

또한 갑자사화,무오사화를 통해 사람파,훈구파를 견제하여 중앙집권(왕권강

화)적 국가로 만들어 조선시대 기존의 틀을 깨기 위한 개혁적 조치의 일환

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표현된 연산군은 그저 놀기만 하는 왕인줄 알았는데

잘못알고 있는 것을 또 소개하자면

연산군이 자신의 사냥터를 위해 민가를 강제로 부수고 철거민들을 멀리 쫓

아냈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답니다.

연산군일기에 승지에게 명한 것을 보면 궁100척 이내에 민가가 있는 것은

조선의 국법에 불가한 것으로 이 민가를 철거하라 명하고

당시 겨울인것을 감안하여 철거당한 백성에게 집터를 제공하고 집의 크기

로 큰집,중간집,작은집으로 등급을 나누어 무명 50필,30필,15필 지급하고

명했습니다. 그 후 다시 겨울인 것을 감안하여 봄이 될때까지 기다려 철거하

라고 재차 명령을 내립니다.

이런 정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안하는 정책인데.

철거민에게 보상금 지급하고 거기다 집을 지울수 있는 터를 제공한다는 애

기이네요.

언문(한글)사용을 못하게 했다는 것도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투서로 이루

어졌는데 바로 취소하고 책,악보등을 편찬할 때 훈민정음을 자주 사용했습니

다.

연산군시대 채홍사와 채청사를 파견하여 사헌부,홍문관,성균관을 기생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며

이 기생들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가무집단이며 그중 연산군과 깊은 관계가

있던 기생은 두어명 정도랍니다.

월산대군부인 박씨를 범했다고 하는 것도 실제로 박씨의 나이가 50대 노인

이었고 연산군은 30대초반이라 이것도 조작된 것입니다.

그외에도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예로부터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고 하지요.

연산군 또한 당대에는 있을수 없는 폭군이었지만 지금은 재평가가 이루어지

고 있다니 하니 흥미로운 일이죠.

그러나 그가 꿈꾸던 조선을 만드려는 과정에 너무 가혹하게 한 부분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아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역사 또한 훗날 후손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

는 것과 다르게 재평가할수도 있겠죠.

지금의 일을 우리가 평가한다는 것은 객관적일수 없으니깐요.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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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대 왕중에 재위중 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던 왕이 두 분 계시죠.

연산군 과 광해군 이시죠.

그중 광해군은 당대에는 몰라도 지금 현재의 역사관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

시는 분이시죠.

오늘 알아볼 연산군은 당대에나 현재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시죠.

그러다보니 가장 많이 알려진 군주이며 드라마나 영화로도 가장 많이 나왔

던 왕이죠.

어찌보면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사신 왕이시죠.

지금 현재 방영중인 MBC월화드라마"역적-백성을 훔친 도적"또한 연산군시

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죠.

연산군에 대해 다시한번 알아보는 것도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중

에 하나이겠죠.

 

연산군은 1476년(성종 7)11월7일 조선의 9대왕인 성종의 맏아들로 출생하였

고,어머니는 원래는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으나 왕의 총애를 받아 중전의 자

리까지 오른 윤씨입니다.

연산군은 왕위승계과정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순조로웠으며 성종의 적장자

로서 이름은 융(㦕)이고 7살때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2년 동안에 세자수업을

착실히 받아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않을 뿐더러 오히려 뛰어났다고 기

록될 정도로 학문적 소양은 높았습니다.

19세가 되던 해 성종이 승하하자마자 조선의 10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초기 연산군은 아버지인 성종대에 완성된 삼사(三司)즉 사헌부,사간원,

홍문관을 통한 왕권의 견제을 왕권의 약화로 보고 이런 구조를 혁파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집권초기시 국정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왕권구축에 방해되는 것은 능상(凌上)으로 보고 이것을 척결

하는데 통치기간 전력을 기울여 처음에는 삼사를 점차 모든 신하들에게 적

용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무오사화를 통해 간쟁과 감찰를 기본 임무로 하는 삼사의 기

능을 축소시킴으로서 왕권강화의 목적을 달성하여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본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강화된 왕권을 자기 욕망

충족과 해소를 위해 자유로운 왕권행사로 여겨 연회,음행,사냥,금표(출입금지

를 알리는 푯말),개인을 위한 민가철거,발언의 통제 등 많은 기행을 함으로

써 국정의 파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삼사의 통제로 무오사화을 일으켰다면 갑자사화를 통해 전체 신

하들의 통제로 까지 이어졌고 그로인해 모든 대신들이 연산군에게 멀어지

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왕권강화의 본래취지를 잃어버려 중종반정으로 조선 역사상 폐위

되는 군주가 되었죠.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고 두 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치세는 조선초 부강한 국가로 계속적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마감함으

서  이후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나 붕당의 시초가 되었으며 당쟁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난으로 국운이 쇠퇴하게 만들었

다.

끝으로 우리가 흔히 쓰는 '흥청망청'은 연산군의 기이한 여성편력에서

나온 말인데요.

연산군시절 흥청(興靑)은 궁에 들인 여인들을 높인 말이다.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를 파견해,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건강한 말을 뽑아

각 고을에서 관리했다. 기생의 명칭도 운평(運平)이라 하고 궁중에 들어가면

흥청(興靑)이라 불리며 신분이 올라갔는데, 잠자리가 임금의 마음에 들면 천

과(天科)흥청, 그렇지 못하면 지과(地科)흥청, 이도저도 아니면 반천과(半天

科)흥청이라 불렸다. 흥청과는 3백 명, 운평과는 7백명에 이르러 무려 1천여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놀았다네요.

그래서 백성들이 흥청이들과 연산군이 놀다가 망했다는 뜻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posted by 위생단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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